두 남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말린 고기를 씹으며 서로 말을 주고 받았다. 지금 현 상황은 아주 최악이라 할 만큼 자신들에게 불리했고 또 대 광장엔 아직도 인질들이 많아 격렬한 공방을 치르기가 아주 애매했다. 만에 저들과 미친 듯 칼부림질을 하다 배 밑 둥에 구멍이나 이 거대함선이 바다 속으로 침몰해 버리면 안 그래도 최악에 상황을 더욱더 부추겨 더 이상 말로 구제할 길이 없는 미궁에 치닫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위험천만하고 하나 있는 목숨이 위태위태 한 이 상황에 둘은 말린 고기 절삭분해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먹는 꼴을 보아하니 어지간히도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이 둘 주위로는 이미 속이 텅 비어버린 말린 고기 봉지들이 즐비하게 널려져 있었고 목을 축일 소량의 맥주와 주스가 그들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한 게 아닌가 싶어요.」
「뭐가요?」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대 광장에서 갓 잡아 올린 싱싱한 바다가재를 통째로! 그것도 공짜로 마음껏 시식 할 수 있는 시간인데… 현실은… 고작 말린 고기뿐……. 너무 암담해요. 배고파요~ 가재가 절 부르는데, 가까이 있는 것 같은데 다가갈 수 없어요. 히잉~ 너무해요~」
「음… 그건 참 아쉬운 일이죠.」
굉장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앨런이 말했다. 이 모습에 아이니도 고개를 푹 떨어트리며 남은 말린 고기를 마저 절단분해 했다. 남은 고기마저 모두 깔끔하게 해치워버린 두 사람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살금살금 다른 구역으로 이동했다. 마치 남에 집에 물건을 훔치러 들어온 도둑고양이처럼…….
그들이 제일먼저 찾아간 곳은 기관실이었다. 우선 이 고속항행중인 이 배를 세워놓고 사람들을 차례차례 대피시켜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기관실은 무수히 많은 케이블과 과학으로만 설계된 난생 보도 못한 갖가지 기계들이 어지럽게 설치되어 있어 이쪽으론 문외한인 두 사람은 두 눈 뻥긋 뜨고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어… 어떡하죠? 근처에 기계전문가로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없는 게 당연하죠. 모두 습격자들에게 끌려갔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고 참 신기하네요. 아포칼립스의 과학력을 이렇게까지 사용할 줄 알다니……. 다시 인간의 경이로움에 찬사를 보냅니다.」
「지금 감탄하고 있을 때에요!?」
딱!
「아얏!」
「좀 긴장이란 걸 하시란 말이에요!」
너무 속 편한 앨런을 보다 못한 아이니는 긴장하라는 의미에 꿀밤을 그에 이마에 강하게 먹였다. 이에 앨런은 자신의 고운 이마를 지문이 닳도록 비비며 아픔을 해소시키기 위해 발버둥 쳤고 이 와중에도 아이니의 설교는 계속되었다.
「속 편한 것도 정도가 있어요! 매사 긍정적인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긴장감까지 잃어버리시면 곤란하다고요! 너무 극심할 정도로 긴장에 몸을 맞기는 건 좋지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으셔야죠. 용병계에서도 “크레이지”라 불릴 만큼 강한 검술실력을 지닌 분이 그러면 되겠어요? 아니면 자신의 실력을 너무 믿고 계신 건가요?」
「음… 솔직히 말하면 1:1의 싸움으로 저와 대등이 싸워줄 사람은 은색머리카락을 가진 녀석 뿐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녀석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에요. 저 또한 긴장하고 있다고요. 그냥 겉으로만 그런 것일 뿐입니다. 너무 핏발세우며 화내지 않으셔도 되요. 아셨죠?」
하면서 해맑게 방긋 웃어 보이는 앨런. 이 모습에 아이니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이제 관두련다.” 라는 표정을 지었다. 태연을 넘어 이제 당당하기 한 그의 모습은 솔직히 그녀로서도 본받고 싶은 모습이었다. 어찌되었든 둘은 기관실 이곳 저곳을 해집 듯 돌아다니며 보이지 않는 단서를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뭐 찾은 거라도 있어요? 배를 정지시킬 레버라든가 마법장치라든가…….」
도리도리.
앨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대신했다. 이쪽 방면으론 거의 아는 게 없는 두 사람으로선 한숨만 나왔다. 배를 멈출 방법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오러블레이드를 대량을 방출해 일순간에 기관실을 폐쇄시켜버리고 싶지만 그건 상상에서나 실행할 일이지 현실에서는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군요. 기관실은 잠시 뒤로 미루도록 하죠. 나중에 전문가를 하나 구출해서 해도 늦지 않으니까요. 지금 현 상황으로 따지면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 달이니, 이 시간을 잘 활용해야죠?」
「그래야겠네요. 그럼 어디로?」
「아무대나~」
「에에?」
태연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무책임하기까지 한 앨런이었다.
<대 광장>
30여명에 달하는 검은 예복을 차려 입은 어쌔씬들이 대 광장에 모습을 들어냈다. 이 들의 갑작스런 등장에 수호기사와 친위대들은 노골적인 적의를 들어내며 검을 들이댔지만 어쌔씬들은 저들의 애교가 듬뿍 넘치는[?] 장난을 상대해줄 만큼 여유롭지도 또 한가하지도 않았다. 마음 같아선 단방에 전부를 몰살시켜버리고 싶은 마음이 하늘땅 만큼 있지만 함부로 일을 저질렀다간 추후 벌어진 봉변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에 그건 마음 속 깊이 묻어두기로 했다.
「하그제! 하그제 어디있나!!」
「……그… 그는 지금 없네!」
「뭐?」
어쌔씬 일행 중 유난히도 골격과 덩치가 좋은 사내가 버럭 외치자 꽤나 귀품이 느껴지는 귀족 한 명이 말을 더듬거리며 용기 내어 외쳤다. 덩치의 사내는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자 화가 났는지 쌍심지를 위로 밀어 올리며 입술 근육을 파들파들 떨기 시작했다. 꽤나 다혈질인 모양이다.
「이 자식이 죽으려고 환장했나! 네놈들! 하그제놈 어디다 빼돌렸어? 엉!? 죽고 싶지 않으면 이실직고 말하란 말이야! 이 개 버러지 같은 새끼들아!」
「뭐… 라고!? 이게 뚫린 입이라고!!」
덩치의 사내가 자신들에 존재성과 명예에 심한 욕설을 서슴없이 내뱉자 주위 기사들이 술렁이기 시작하며 그들의 눈빛이 한층 더 날카롭고 무섭게 변했다. 마치 독아를 번뜩이는 한 마리의 독사처럼.
「가소로운 놈! 본때를 보여주지!」
그의 무례함이 너무도 마음에 안 들었는지 얼굴이 굉장히 잘생긴 기사 한 명이 터벅터벅 광장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 기사의 눈빛은 두려움이라곤 눈곱 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강한 상대와 싸운다는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차 있었고 또 화산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투지도 슬쩍 엿보였다.
「나의 이름은 크린트 폰 카리라스라 한다. 네놈의 오만방자하고 버릇없는 말투와 행동을 고쳐주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다. 검을 뽑아라! 그리고 예를 갖춰라!」
「쳇! 우습지도 않군. 뭐, 이런 것도 나쁘진 않겠지. 나의 이름은 하벤하드다. 성은 없다. 그리고 난 검 같은 쇠붙이는 쓰지 않는다. 형님에게 직접 사사 받은 낭아수도만 있다면 검 같은 것은 있으나 마나 한 물건이 되지. 와라! 지금 네놈의 행동이 용기 있어 보일 수도 있지만!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게 멋대로 대드는 행동은 용기가 아닌 만용이라는 것을 내 오늘 이 자리에서 가르쳐 주지! 저승에 가서 후회하라!」
「헛소리! 덤벼라!!」
순간 둘의 신형이 그림자에 녹아들 듯 사람들의 시계에서 사라져버렸다. 기사는 역시 소드마스터란 명호가 부끄럽지 않을 만큼 놀라울 정도에 속도를 보여주며 몸을 움직였고 자신으 하벤하드라 소개한 덩치의 사내도 그 산처럼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빠른 몸놀림으로 상대를 압박해 나갔다.
콰쾅! 콰르르!
「제법이군!」
「여유가 넘쳐 흐르는군! 어리석기는!」
푸샤악!
「컥!」
「허점을 보이지 마라! 반쪽 짜리 기사 놈아!」
하벤하드의 손이 육안으로 확연히 구분되지 않을 정도에 속도로 크린트의 어깨를 사정없이 꿰뚫었다. 정말 한 순간에 벌어진 기가 막힌 장면이었다. 죽음으로 까지 가는 치명상은 아닐지 몰라도 이렇게 쉴새 없이 몰아쳐오는 공격의 폭우 속에서 어깨의 부상으로 한쪽 팔을 자유로이 쓰지 못한 다면 살아도 살은 목숨이 아니게 된다. 하벤하드의 공격은 상하좌우 모든 사각을 노리며 변화무쌍하게 크린트의 육신을 유린해 갔다. 이미 승패의 양상은 하벤하드의 쪽으로 기울어졌다고 봐도 무관했다.
「크윽!」
「시시하군! 앙! 시시하다고!!」
서거걱!
촤아아아!
「크아아아악!!」
「이것이! 이것이 소드마스터의 실력이란 말이더냐!! 지나가는 개가 웃을 노릇이군!!」
하벤하드의 낭아수도가 은빛 섬광을 일으키며 번뜩였다. 그러자 크린트의 상반신이 금방이라도 폭발 할 듯 거세게 요동치더니 이내 대량의 혈액을 허공에 뿌리며 처참하게 살육되었다. 크린트의 몸은 말이 아니었다. 보기만 해도 아침에 먹었던 음식이 모두 입 밖으로 가출 할듯한 이 광경은 실로 처참하고 또 끔찍했다.
「쳇! 뭐야! 손만 버렸잖아!」
고수 대 고수의 싸움은 기 싸움으로도 승패가 갈리기도 한다. 이번 싸움은 기 싸움이라기 보단 실력의 차이가 월등해 승패가 금세 갈린 것이다. 하벤하드는 마구 신경질을 내며 겁에 질려있는 귀족들을 드잡이질 해 하그제가 어디로 갔는지 캐물었다. 하지만 그 누구 하나 확연하고 정확하게 말해주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런 제기랄! 여기 있는 놈들 다 죽여버리기 전에 당장 말하지 못해? 전부 죽고 싶나! 앙!!」
「하벤하드님. 방금 경황이 없어 말을 못 드렸는데, 에어리어 A-12구역에서 하그제로 추정되는 인물을 발견했다고 텔레파시스템으로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뭐라고!? 그걸 왜 지금 예기하고 지랄이야!」
하벤하드는 부하의 멱살을 강하게 부여잡고 골이 덜컹거릴 정도로 흔들어대며 목도 안 아픈지 마구 악을 써댔다. 정말 다혈질이었다. 이에 부하는 연신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지껄이며 사죄했고 하벤하드 또한 이 이상 들볶는 것도 귀찮은지 밀쳐내듯 그를 쳐내며 황급히 대 광장을 나섰다.
<에어리어 A-13구역>
구석 모퉁이에서 순수귀족들만이 입고 다니는 고풍스런 옷을 착용한 어떤 이가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 무언가 작은 물건에 대고 아주 조용히 속삭였다. 눈빛과 표정을 보아하니 눈빛은 주위를 경계하는 눈초리였고 표정은 굉장히 심각하면서도 말투는 아주 귀한 존재를, 마치 자신의 직속상관을 대하듯 아주 조심스러웠다.
「예…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무리 지능이 떨어지는 인형이라 할 지라도 파괴력과 민첩함에 있어선 어지간한 소드마스터 조차 뛰어넘을 만큼 강한 녀석들이다. 그걸 어떻게 쓸지는 네놈에게 달렸다. 이렇게까지 해주는데도 놈들을 처치하지 못했을 시! 네놈은 우리 조직에서 영구추방이다! 그리고!!>
꿀꺽.
<사신의 낫을 가진 혈마[血魔]가 네놈의 목을 치러 갈 것이다.>
「예… 옛!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고 있었다. 식은땀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으며 푸른 벼락과도 같은 날카로운 번개가 사정없이 자신의 몸을 꿰뚫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이와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게 만들어진 물건인 텔레파시스템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굉장히 엄숙하고 차분했으며 북풍한설을 연상케 할 정도로 차가웠다.
<그럼 무운을 빌지.>
「옛!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뚝.
일방적으로 텔레파시스템의 송신이 끊겼다. 노이즈조차 없었다. 완전 침묵. 구석 모퉁이에 앉아 진땀을 빼고 않았던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작은 미소를 지었다. 조직에서 자신을 믿고 <인형>까지 보내주었다. 수도 꽤나 된다고 했다. 그는 미래에 벌어질 일 따윈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만 있다면 낭인대[狼人袋]따윈 일 검에 절단 내어 버릴 수 있을 만한 힘을 가졌기에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