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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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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5.12.12 20:14:50 조회: 193 추천: 0 |
00. 존재(存在) - Change
"우윽……."
오른팔의 감각이 점점 사라져갔다. 아니,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폭발에 의한 충격으로, 나의 오른팔은 무참하게 쥐어 뜯겼다. 피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이대로 죽는 것인가.
저벅
소리마저 잃어가던 세계에서 조용히 울려 퍼지는 발자국 소리만이 들려 왔다. 머지 않은 곳에 사람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저벅거리는 소리를 들어 보니, 아마 이 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았다.
저벅, 저벅
점점 발자국 소리가 커져 온다. 삶에 대한 희망과 죽음의 공포가 겹쳐 오고 있었다. 아군이 온 것이라면 나는 안전하게 살아남을 것이고, 적군이라면 그들의 놀잇감이 되어 무참히 죽을 것이다. 꺼져가는 시야의 등불을 억지로 키면서 그 곳을 바라 보았다.
"아, 아아……."
하늘에 신 따위는 없었다. 피를 뒤집어 쓴 것 같은 붉은 군복의 사내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나의 적이었다. 이제 나에게는 죽는 일만 남은 것이다.
"음?"
주위를 둘러보던 그 사내는 나를 발견한 모양인지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하며 나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적은 방심하고 있었다. 하나남은 왼손을 가지고 필사적으로 주머니를 뒤적였다. 주머니에 잡히는 날카로운 쇠의 감촉이 이리도 반가울 수 없었다.
그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연거푸 뒤적거리고 있는 것은 아마도 나의 것과 같겠지. 점점 그의 몸이 가까워져 왔고, 나의 온 정신은 단검으로 집중되어 간다. 주머니에 들어가 있지 않던 그의 손이 나에게로 다가왔다. 이 때다.
"저…… 괜찮나요?"
푸욱
두근
어쩔 수 없었다.
두근
이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으니까.
두근
전쟁이란, 이런 것이니까.
두근
눈 앞에는 자신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사내가 서있었다. 멍하니, 그저 자신의 배에 꽂힌 단검을 바라보면서.
"으……ㅇ?"
조금씩 피가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 사내의 입에서 작은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것은 곧 아주 거친 소리로 변모해갔다.
"으, 으억. 커……."
두근
그의 몸이 허물어져간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죽음의 공포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상황을 믿지 못한 것 뿐이니까.
"어, 어째서……."
쓰러진 그의 몸이 나의 몸 위에 사납게 겹쳐졌다. 그리 무겁지 않은 사내의 몸은 상처의 영향인지 뜨겁게 달아 올라 있었다.
-어쩔 수 없었어.
그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말이 목구멍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뇌가 거부하고 있었다.
-거짓말 치지 마.
어쩔 수 없던게 아니었다. 막을 수 있었던 사태였다. 아니, 이런 사태는 오지 않는 것이 정상이었다. 모든게 거짓이었다.
"어째서……."
그의 입에서 한탄과도 같은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 목소리는 확실히 떨리고 있었고, 나를 부여잡고 있는 손아귀 역시 떨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붉은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미안해.
말할 수 없었다. 이런 작은 사과의 말도, 나는 하지 못한다. 점점 그의 몸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심장은 뛰고 있었지만, 그것도 곧 멈추겠지.
두근
하지만, 나의 심장은 그에 반해 더욱 격하게 뛰고 있었다. 터질 것만 같이 뛰는 심장. 아아, 이대로 심장이 터져 죽는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라미아……."
그의 입에서 쥐어짜듯이 튀어나온 이름.
"라, 라미아……."
그는 한번 더 그 이름을, 그리움으로 사무쳐진 그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그의 동공은 힘을 잃어갔다.
두근
나의 심장이, 한번 더 크게 요동쳤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멈추었다. 내 심장의 기운이 그의 심장을 먹어버린 듯, 나는 두사람 분의 심장 요동을 지닌 것만 같았다.
"우욱……."
그의 몸은 이미 차갑게 식었고, 나를 잡고 있던 손 역시 힘없이 풀리어 땅바닥에 떨어졌다. 힘을 잃은 사내의 몸은 무겁지도 않아, 쉽게 옆으로 치울 수 있었다. 입에서는 구역질이 튀어 나왔다. 흉측한 구토물이 죽은 사내의 위에 떨어졌다. 하지만 사내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아, 진짜 죽은 거구나. 죽은 거였다. 사람이란 이렇게 쉽게 죽는 거였구나. 새삼 깨달았다.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누워있는다고 해서, 무언가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별로 누워있던 것 같지도 않았건만 현기증이 닥쳐왔다. 옆에는 이미 죽어 사후경직이 시작된 사내가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사내의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의 유품이 있으면 버리는 것이고, 나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취한다.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으……?"
사내의 주머니에는 내가 바라는 것도 없었을 뿐더러, 한가지 유품도 없었다. 이런 전쟁터에 흘러 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부적이라던가, 아니면 가족들이 건네준 사진이라던가…….
"아."
그의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손끝에 무언가가 낚인 것 같다. 아마 감촉으로 보아 종이겠지. 편지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의 안주머니에 고이 간직되어 있던 편지를 꺼내보았다. 핑크빛 편지 봉투에 갑자기 숨이 막혀왔다. 아아, 그래. 나는 한 사람을 죽여, 다른 사람의 인생을 죽인거였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었다.
"……."
속이 울렁거린다. 안에 있던 모든 것이 뒤집혀 올라올 것만 같았다.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느낌이 전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편지를 쓴 사람의 이름이 정자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 Lamia Mintz -
죽어가던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이, 그 편지에 적혀 있었다. 어차피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이 들어 맞지 않았으면 좋은 것이 몇개 있었다. 이 경우는 후자에 속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꺼내었다. 봉투 안에는 편지 조각과, 사진이 있었다.
- 하멜 오빠. 일주일만 지나면 제대를 하지만, 이렇게 정기적으로 올리는 편지에 재미가 들려서 올려 보아요. 지금 나라가 전쟁 태세라지만, 당장은 일어나지 않겠지요?…… -
"우윽."
몸이 뒤틀린다. 몸의 고통이 아닌, 정신적 고통에 의해서 전신이 난자당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읽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 돌아오면 결혼식 준비를 서둘러야죠. 어머니께서도 기대 많이 하세요. 드디어 망나니 같은 딸 시집 보낸다고……. -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사내의 어머니의 인생도 죽였다.
- ……글이 너무 길었네요. 이만 글을 줄여야 겠어요. 그럼, 제대하는 날 뵈요. 라미아가, 하멜 오빠에게 사랑을 담아. 1091년 10월 26일 -
옆을 돌아 보았다. 이미 죽은 사내. 지금 날짜는, 12월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몸을 일으켰다. 편지를 주머니에 꼬깃꼬깃 집어 넣었다. 편지 봉투에는 주소가 적혀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 나는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손거울을 꺼내 들었다.
"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사내, 하멜의 얼굴. 두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 후,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왼쪽 가슴에 적혀 있던 나의 이름을 바라 보았다. 노란색 실로 급조한 것처럼 보이는 이름.
-Lameria Sorin -
그것을 망설임 없이 가슴에서 뜯어냈다. 그리고 죽은 하멜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왼쪽 가슴에도 노란색의 실로 급조된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Hamelion Ellience -
조심스럽게 그것을 떼어냈다. 아무 저항없이 뜯어진 그 이름표를, 나는 나의 가슴 부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나는……하멜이다."
라메리아는 죽고, 하멜이 남았다. 그의 얼굴은, 나의 얼굴이었다. 떠나간 자리에 도착한 사내들은 라메리아의 죽음을 슬퍼하겠지.
"나는…… 하멜이야. 하메리온 엘리언스."
그렇게, 읊조렸다. 나쁘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래, 나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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