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간 그 무렵. 하그제는 좌절했다. 그는 두 무릎을 꿇고 식은땀을 좔좔 흘리며 낙심했다. 자신의 충실한 부하이자 마지막 카드인 아포칼립스의 유물이 낭인대 전멸이라는 과제를 충실히 실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대파되었다는 정보를 하그제는 막 입수했다. 텔레파시스템은 통신기기로서도 훌륭하지만 주위에 미세한 마력입자를 뿌려 본인이 찾고자 하는 인물의 기척과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편리기계였다. 그리고 막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인형들 전부 전멸이라는 내용이었다. 두려웠다. 추후 찾아올 조직에 대한 보복이 두려웠다.
‘죽을거야··· 죽을거야··· 죽을거야······ 이를 어쩌면 좋지? 그 들을 부를까? 아니··· 아무리 그 둘이라고 해도 이기지 못할 거야······’
하그제는 쿵쾅 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무궁한 애를 썼지만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결과가 상층부에 보고 되면 집행자 혈마[血魔]가 사신의 낫으로 자신의 목을 칠 것을 자명한 일.
부르르르!
「헛!」
진동음이 울렸다.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몸 안에 있는 모든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이 통신기는 자신의 조직과의 연결 밖에 되지 않았다. 분명 이 크루즈함선에 몰래 침입한 첩자가 인형들이 모두 파괴되었다는 정보를 입수 그리고 정보부에 넘겼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텔레파시스템의 스위치를 눌렀다.
꾸욱.
「하그제입니다.」
「실패했더군. 하그제.」
「며··· 면목 없습니다······.」
음의 높낮이도 없는 무미건조한 목소리. 아무런 긴장감도 없었고 두려움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런 목소리. 하그제는 심장이 덜컹 떨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말 한 마디면 조직 전체가 움직일 정도로 강한 영향력을 가진 존재였다. 그와는 하늘과 땅 만큼 신분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감히 함부로 대할 존재가 아니었다. 텔레파시스템 너머에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그제는 바로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예를 갖추며 더듬거리는 어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를······.」
「네놈이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
오금이 다 저릴 정도로 섬뜩한 음성은 하그제의 심장을 관통하는 하나의 비수가 되어 심령을 압박해나갔다. 무서웠다. 너무 무서워 오줌을 지릴 것 같았다. 하지만 하그제는 참았다. 세포 하나하나가 공포에 질려 경악과 비명을 지르면서도 그는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겨우 참아내었다. 두 눈망울엔 공포와 좌절, 그리고 두려움이 한데 섞여 초점조차 재대로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난 관대하니까······. 목숨만은 살려주지.」
「저··· 정말 입니까?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목숨을 부지하는 건 너 하기 나름이다. 너에게 직접적인 공격은 하지 않는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뚜- 뚜- 뚜-
일방적으로 끊긴 텔레파시스템. 하그제는 그의 말속에 담긴 뜻을 알지 못했다. 직접적인 공격은 가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무슨···? 낭인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 스스로 몸을 지키란 것인가? 그거라면 이야기가 된다.
「우선 여기라면 몸은 숨길 수 있지. 그런데 나머지 귀족들은?」
자신의 몸은 안전하지만 귀족들의 신변은 아직도 위험하다. 저들까지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킬 수만 있다면 자신의 자리가 조금 더 확고해지고 신뢰도 더 높아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방법이 없었다. 만약 배에 끊어진 동력만 원활하게 작동시킬 수 있다면 그 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는 데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어떡해?
「지하루트를 통해 기관실로 가야겠군.」
머릿속에 암기되어 있는 배의 루트를 통해 하그제는 조심스레 기관실로 향하는 길목을 밟았다.
<어느 해협의 깊은 바다 속>
고요하던 바다 깊숙한 곳에서 거센 물보라가 일어났다. 자연현상이라고 하기엔 해수면은 너무 조용했고 하늘 또한 징그러울 정도로 맑고 평온했으니 말이다. -지금은 밤이었지만- 그럼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이건 자연현상이 아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인공 물보라로 단정 지을 수 있다. 이 정도에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킬 수 있는 건 바다의 제왕이라 불리는 실버드래곤과 몇몇 영물이라 불리는 불가사의한 생물들이 고작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붉은색 적색 안광을 띄고 있는 괴물은 실로 무섭기 짝이 없었다.
「샤아악!」
빛조차 통하지 않는 바다 속 깊은 속에서 끝부분이 갈라진 핏빛처럼 진한 어느 것이 바다 속을 휘저으며 타액을 밖으로 분출했다. 타액은 바닷물과 접촉하자마자 강한 증발을 일으키며 서서히 잠식되어 갔고 거대한 괴물이 한번 움직일 때 마다 허리케인같은 강풍이 바다 속을 휘저으며 물속에 잠긴 암석을 모조리 부서 버렸다. 짙은 어둠으로 인해 확실히 분간되진 않지만 적색의 안광은 보는 이로 하여 심장을 옥죄게 할 정도로 무서웠다.
쿠르르릉!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신체길이. 몸의 둘레는 거대한 통나무 10여그루를 동시에 묶어 놓은 것과 비슷할 정도였고 드래곤의 비늘과 곁 주어도 손색없는 묵색의 비늘은 바닷물의 압력을 거뜬히 막아주었다. 뱀은 더욱 깊고 깊숙한 바다 속으로 몸을 숨기며 소리 없이 고요하게 거리를 이동했다. 서서히 공포의 그림자가 바다 위에 드리우고 있었다.
<거대함선 크루즈호>
그 동안 푹 쉬어둔 덕에 기력을 다시 되찾은 아이니와 앨런은 자리에서 일어나 선내를 돌아다니며 주위 근황을 살폈다. 그와 동시에 적의 동태를 살피는 것 또한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들은 기척을 죽이며 충격의 진원지를 찾았다. 하지만 이미 싸움은 끝이 나버렸고 더 이상 들려오는 소리도 기척도 없기에 쉽사리 적들을 찾아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과제였다.
「이제 어쩌죠? 하그제백작님도 안 보이고 대 부분 사람들은 각자 피신한 상태고··· 정말 엉망이네요.」
「그렇긴 하네요. 우선 상황을 좀 더 지켜보기로 하죠. 배는 점거 되었어도 시간은 많으니까요.」
애초에 이들은 하그제백작이 준비한 인형들에게 일말의 희망도 걸지 않았다. 인형에게 질 정도로 나약한 녀석들이었다면 이런 무모한 계획은 실행에 옮기지 못했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이곳엔 많은 국가인사들과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각계각층의 유능한 귀족들이 참석한 대규모 호화여행이었다. 그런 곳에 실력도 없는 오합지졸들이 찾아와 행패를 부린다는 것은 “나 죽으러 왔으니 내 목 좀 쳐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귀족들과 함께 시승한 기사들은 결코 평범한 실력을 가진 이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은 적들은 모두 그들을 웃도는 실력을 지닌 존재인 것이다.
「우리 심심한데 갑판이라도 한번 가볼까요?」
「예에? 많이 심심한가 보군요.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상황이 이래도 우리에겐 직접적인 피해는 없으니까요. 우선 남쪽대륙으로 가려면 앞으로 29일은 더 있어야 한다고요. 아직 배도 살아 있잖아요. 기관실에 이상이 생기는 바람에 몸을 떠맡긴 상황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아직 침몰되지는 않았잖아요.」
「곧 침몰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네요.」
「하하··· 그런가요? 기분 탓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괴이쩍은 미소를 흘리며 말하는 앨런과 이제는 지쳤다는 표정으로 일관하는 아이니. 두 사람의 대화는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내용은 조금도 담겨있지 않았다. 쉽게 말하자면 잡담이었다. 아이니와 앨런은 터벅터벅 걸으며 갑판으로 향했다. 아침에 봤던 거와는 다르게 갑판이든 내부든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갑판 바닥도 금이 갈라며 조그만 충격을 주면 폭삭 무너질 것만 같았다.
「이거 좀 위험하지 않아요?」
「뭐가요?」
「그렇게 튼실해 보이던 배가 금세 바다 밑으로 침몰할 것 같아서······.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
「좀··· 그렇긴 하네요. 하지만 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대함선이니 그 이름값은 하겠죠.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물에 빠질 것 같으면 제가 지푸라기를 던져 드릴테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딱!
「아얏!」
아이니의 손이 움직이며 앨런의 이마에 따끈따끈한 꿀밤을 먹여주었다. 별로 맛있지는 않았다. 고통만이 찾아올 뿐··· 앨런은 다시 열나게 이마를 문지르며 고통을 해소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 와중에도 아이니의 설교는 계속됐다.
「제가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릴 일은 결단코 없지만 만에 빠진다면 “제가 구해 드릴테니 걱정 마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 로맨틱하지 않나요? 정말·····.」
「우··· 장난인데······.」
「그래도!」
「네. 구해드리죠.」
「아이고······.」
기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앨런을 보며 아이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이들에게 남은 시간은 정확히 29일. 29일 동안 좋으나 싫으나 적들과 함께 해야 한다. 만약 그들의 뜻대로 하그제백작이 말끔히 처리된다면 그들도 모든 일을 접고 떠나겠지만 지금 종적을 완전히 감춘 그를 찾아서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 하기에 앨런과 아이니는 언제 올지도 모를 적을 항상 경계해야 했다.
「배 안에서 전쟁 중이긴 하지만 여긴 평화롭네요. 많은 별들도 보이고······. 달도 아름답네요.」
「후후··· 그렇군요. 아름다워요.」
난간에 양 팔을 걸치고 고개를 들어 별들로 인해 빛나는 찬란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앨런과 아이니가 서로 말을 주고 또 받았다. 둘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어두운 저택의 한 곳>
어두컴컴한 저택의 한 구석. 테이블과 책장 그리고 의자가 전부인 이 방에서 붉은색으로 온몸을 치장한 한 노인이 뒷짐을 지고 테라스 너머로 비춰지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그제백작이 실패하고 배는 포기해야하고··· 배 안에 보관되어있는 금고에 들어있는 것은 그들로서도 심히 아까운 물건들이었다.
「그것들을 포기해야 하다니··· 정말 아깝군.」
「내 자네의 심정은 잘 안다네. 그래도 어쩌겠나? 할 수 없는 것을······.」
「훗··· 그렇겠지.」
크와르의 간부 두 명이 아쉬움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금고 안에 숨겨진 물건은 버너디움을 세공하고 가공하는데 필수불가결인 제품인 강화세공기였다. 강화세공기는 버너디움 뿐만 아니라 미스릴, 오리하르콘, 철괴 같은 모든 금속을 가공시킬 수 있는 물건으로서 가격으로도 천금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비싼 물건이었다. 그걸 보상판매 없이 바다 깊숙이 버린다는 것은 조직에 크나큰 손실이었다. 하지만 회수한다는 것은 지금 상태로서는 불가능이었다.
「그래도 참게. 각국의 고위귀족들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우린 소득의 수확을 거든 셈이니 말일세. 그들을 차례차례 없애버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 귀찮지. 그냥 한꺼번에 싹쓸이 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하나 내주고 하나 받은 걸로 치세.」
「흠······. 배도 상당히 아까운데 말이지······.」
「그만 포기하게. 그 정도에 배를 만들 정도의 자금은 우리에게 넘쳐서 흐를 만큼 있다네. 그건 그렇고 시드드란은 어느 해협에 있는지 알고 있나?」
「정보부에서 올라온 서류에 따르면 아직 칼 해협에 있다고 하더군. 1시간 후면 목표와 접촉 할 수 있을 걸세. 썩을 하그제놈이 잘만 해주었다면 시드드란을 써먹을 필욘 없을 텐데······.」
「하하. 그리 화내지 말게.」
하얀 백발과 하얀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노인이 말했다. 이에 온몸을 붉은 색으로 치장한 노인이 험상궃은 표정과는 다르게 자소어린 미소를 띠며 살짝 웃었다.
「힘든 나날이군.」
그렇게 밤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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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올리고 가는 저... 죄송..
다른 분들 소설 다음에 꼭 읽도록 하겠습니다.
매일 깜빡 하네요;;;
그럼 모두들 건필하시구 감기~ 조심하세요.^^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