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궁의 내성 입구에 도착 했을 때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의 풀네임은 벨토나 크리스트. 아밀리언 그녀도 한 번 쯤은 들어 본 적이 있는 명문가다. 벨토나 하면 떠 오르는 것은 휘몰아치는 거센 검격과 섬전과도 같은 창. 벨토나 가의 병사들은 전대 가주 무렵 일어났던 중소규모의 국가전쟁에서 이름을 날렸다. 이 것은 단지 점점 잊어가는 이름을 되새긴 것일 뿐. 벨토나 가는 건국 공신인 메리시아 라는 가문의 속하 가문이었으나 메리시아의 몰락 후 독립한 벨토나는 그들의 독특한 검술과 창술로 많은 대회를 휩쓸어 이름을 날린 것이다.
그 명성이야 제국에서 무예대회가 사라진 후 부터 잠잠해 졌지만 말이다.
아밀리언은 감사하다는 말 하나만 남기고 마차에서 내렸고 남자 역시 고개만 끄덕이고 문을 닫았다. 서로 껄끄러운 것이 없었기에 불쾌하거나 좋지 않다거나 할 일이 없었다.
"아차 그러고 보니 내 이름을 밝히지 않았네..."
이제서야 생각이 난 것이다. 무례해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지만 이내 지웠다. 무례하게 보였다면 크리스트라는 남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내성 입구는 마차를 타고 있었기에 가뿐히 통과한 그녀는 황궁을 이리 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그걸 보던 병사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벨토나의 문장을 단 마차에서 내린 여인이 다짜고짜 하는 행동이 시골처녀가 도시를 처음 보는 듯한 행동과 흡사했다.
많은 병사들의 눈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녀는 황궁의 거대함에 놀라고 화려함에 놀랐다. 그 때 용기있는 병사 한 명이 그녀에게로 다가가더니 정중히 질문을 했다.
"저기...무슨 용무로...?"
깔끔한 외모의 병사가 정중히 물어오자 그를 조용히 보았다. 상당히 지적이고 날카롭게 보이는 여인이 자신을 조용히 보고 있다. 이런 조용함은 긴장감과 동시에 약간의 부끄럼을 동반해 병사의 얼굴은 아주 살며시 붉어졌다.
그에 이어진 무표정한 아밀리언의 대꾸.
"수석 시녀는 어디서?"
아주 짧은 말이었다. 생략, 생략, 생략. 뒤에 말은 모두 줄이고 예의범절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러나 느낌이 달랐다. 아마 평범하거나 외모가 달리는 사람이 이러한 행동을 취했다면 무례하게 보였을 것이다. 아밀리언의 외모는 절대 평범하지 않다. 미모는 아무대서나 볼 수 있는 미모가 아니었다. 그러한 출중한 외모는 병사의 눈에 꽁깍지를 씌우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아...그 곳은...제가 안내해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물론"
또 다시 말을 줄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좋다고 히 하고 웃는 병사.
황궁의 내로를 지키는 병사들의 얼굴에 떠오른 부러움과 질투.
무언가를 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치안.
이라는 두 글자는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눈 앞의 상황에만 치우쳐져 있다.
아밀리언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내가 당장에 고쳐놔야겠어."
"네?"
"아무 것도."
"아, 네. 하하핫."
그녀의 말투는 지금 당장 수석 시녀가 된 듯 하다. 자신감에서 일어난 확신인가? 아니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병사와 함께 길을 걷던 아밀리언은 황궁이 하나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황궁은 총 9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본궁이자 황궁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스(mos)궁. 황제와 황제의 비가 거주하는 쥬티(juty)궁. 황제와 비 사이에서 나온 황자나 왕녀의 나이가 10세를 넘기면 거주하는 디아르(diar)궁. 황족의 피를 이은 귀족들이 머물수 있도록 시설이 되어있는 고르고(gorgo)궁. 외국에서 온 사신들을 위한 바이몬(bimon)궁. 대규모 연회 시설이 갖추어진 슈시아(susia)궁. 역대 황제들의 제사를 지내는 제단인 타고(tago)궁. 폐위된 황족들을 감금한다고 할 수 있는 안(an)궁. 마지막인 아홉번째 궁의 이름은 넨(nen)궁. 그 곳은 황제와 그의 황자가 아니고선 절대로 용도를 알 수 없는 곳이다.
이 9궁의 이름은 고대에 존재했던 아홉 별자리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리고 궁의 모양도 그 아홉 별자리의 모양과 흡사하다. 별자리의 모습은 꽃의 모양과 닮아있었다고 한다. 각 별 하나마다 붙여진 이름은 고대어로써 저마다 각기 다른 뜻을 지니고 있다.
라는 설명을 해준 병사의 말에 아밀리언은 아아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런 작은 반응을 보면서도 즐거워하는 병사는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여성 앞에서 말 못하기로 소문난 자신이 이렇게 유창하게 말이 줄줄 흐르니 자신에게 꾼의 재능이 있지도 모르는 다는 생각을 가졌다.
"아! 저기!"
병사가 손가락으로 지시한 곳은 고르고궁의 한참 뒤에 떨어져 있는 기사단 연무장이었다. 본디 기사단 연무장은 심사가 있기에 그들을 심사하는 관중석이 있다. 그러한 관중석엔 수석 시녀를 지원하는 영애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귀족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연무장엔 간편하지만 은근히 화려한 복장을 갖추어 입은 빼어난 영애들이 조용히 서 있었다.
긴장이 가득한 몇 몇의 영애는 자신만의 긴장 푸는 법으로 연신 움직이고 있었고 대부분이 아주 차분히 눈을 감고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고요하지만 치열한 열기가 흐르는 연무장. 고요한 열기는 아밀리언에게도 전해졌다. 그녀도 모르게 가슴이 끓어오른다.
이제 저 곳에서 자신은 저 영애들과 경쟁을 치룰 것이다. 아주 치열한. 자신의 삶을 바꿔줄 그러한 경쟁. 자신은 저 곳에서 당당히 뽑혀 빛이 날 것이다.
물론 그 것은 그녀만의 착각이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간과하고 있었으며 저기 나온 여인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저 여인들은 누구보다 뛰어난 수석 시녀가 되기 위해 갈고 닦아왔다. 그리고 이 날 만을 기다려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