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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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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8.02.10 18:30:11 조회: 2,067 추천: 0 |
"이런 일이 생긴다고 왜 미리 말하지 않았던 겁니까!"
예약손님이 있으니 다음에 다시 이용해달라는 직원의 말을 무시한채
뿌연 연기로 가득찬 사무실로 박차고 들어온 남자는 박사에게 소리쳤다.
"잠잘 때 마다 미치겠어! 자꾸 떠오른단말이야!"
박사는 한창 상담을 받고 있는 중이었던 여자에게 잠시 후에 다시 뵙죠, 라고 말한뒤에
의자에 앉아 동그란 안경을 넘어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의 모습이 말입니까."
"그래요. 원래대로라면 그녀의 이름도, 얼굴도 모두 기억나지 않아야하는데,
너무 또렷하단 말입니다. 매일 꿈에 나타난다구, 제길!"
남자는 갑갑한듯 넥타이를 풀어헤쳐 신경질적으로 바닥으로 내던진뒤
상담용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박사의 책상 아래 '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 말끔히 지워드립니다! 합법적인 Removing!' 이라고 써져있는
홍보용 스티커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박사는 책상 위에 놓여있던 안구인식기를 남자의 눈에 한번 갖다댄뒤, 컴퓨터에 무엇인가를
한참인가 입력하더니 남자에게 말했다.
"기억을 지우는 일은 완벽하게 성공했습니다. 당신도, 그녀도 모두 성공적으로. 한치의 오차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런지 설명을 해주시죠, 라고 남자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일단, 그녀는 어떻습니까?"
"저를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그럼 다른남자와 살고 있겠군요,"
이런이런. 하고 박사는 혀를 끌끌 찬다.
"제가 원했던 일인데요 뭐, 그녀의 결혼식도 갔었죠."
"왜죠? 어차피 곧 당신도 그녀를 잊을텐데요. 게다가 당신은 완강히 거부한 그녀를
끝까지 설득해 자신을 지우게 만들정도로, 그녀를 싫어했지않습니까."
"박사님은 아직 몰라요. 싫어한게 아닙니다. 그냥, 어린나이에 결혼하긴 했지만
결혼한지 벌써 7년째에요. 질릴만큼 질렸단 말입니다. 싫어한다기보단 이젠 사랑하지 않는다
라는 표현이 맞겠죠."
그의 말에 박사는 알수 없는 웃음을 지은 뒤 그에게 속삭였다.
"당신은 아직 사랑하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겁니다."
남자는 그에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더니 박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봐요, 내가 그녀를 사랑했으면 무슨이유로 기억을 지우자 했겠습니까?
오손도손 살면되는거지, 제 이야기의 근본부터 흐려놓고 계시니, 참.."
박사는 양손에 깍지를 낀 뒤 고민을 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두번째 서랍을 뒤적이더니 노란 서류 봉투를 꺼냈다.
그 곳에서 나온건 열댓명 정도 사람의 리무빙(Removing) 프로필이었다.
"원래 리무빙 프로필은 보여주지 않는게 이 곳 철칙 아니었습니까?"
남자는 씩씩 거리며 내 것도 남들에게 이렇게 보여줘요?, 라고 박사를 혐오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박사는 손사래를 치며
"수백명의 리무빙 사례중 당신처럼 잔영이 지워지지 않는 특별한 경우이기 때문에, 말 그대로 '특별히' 보여드리는 겁니다."
라고 말했다.
그에 남자는 눈에 힘을 푼 뒤 설명해주세요, 라고 대답한다.
박사는 남자가 즉흥적이고, 다소 신경질적인 면이 있는 사람이군, 이라고 생각을 한 뒤 말을 이었다.
"자, 잔영이 지워지지 않는 경우는 크게 세가지로 나뉩니다.
첫번째는 처음 당신이 했던 말처럼 시술에 문제가 있었던 경우입니다."
박사는 Kim(177) 외 2명. 이라고 써져있는 프로필을 가리킨다.
"잠시의 부작용으로 기억이 다 소진되지 않는 상태였죠. 우리는 즉시 그의 집에 방문하여 다시 작업을 해드렸습니다.
물론, 재작업에 일체의 보수는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측에서 보상을 해드렸죠."
박사는 다음, 이라고 말하며 세개로 분류한 프로필 중 가장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프로필들을 가리켰다.
"자 두번째는, 저희로서는 굉장히 짜증나는 경운데, '철칙'을 지키시지 않은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기억을 지울 때 12시간 전부터는 아무것도 먹지 않아야 되는거 아시죠. 6시간전부터는 소변도 봐선
안된다는 것도요. 그것을 지키시지 않은 채, '괜찮겠지 뭐' 라는 생각으로 리무빙을 받으신 분들이 다수 계십니다.
그 중 일부는 저희에게 재작업을 요청하시는데, 특성상 보수는 두배로 받지요."
뭐 어떻게 보면 저희한텐 이익이니 좋기도 하지만, 이라고 박사는 덧붙였다.
그리고 박사는 나직한 미소와 함께 한개의 프로필을 가리켰다.
"마지막 세번째 경우는, 지우려고 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경우입니다.
애초에 저희는 '싫어하는 사람, 기억하고 싶지않은 사람, 지워버리세요!' 라는 문구로 TV광고를 하고 있듯이
사람간의 관계를 숫자로 비유한다면, 꼭 음의 숫자를 차지하는 사람들만 지울 수 있다는거죠.
위 두가지 경우완 달리 세번째는 자기의 의지로 기억을 지우는 작업을 방해한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뭐 이 경운 괜찮습니다.
이 사람도 당신과 똑같이 작업 일주일 후 저를 찾아왔는데, 한시간도 안지나서 지우기로 한 사람을 다 잊어버리더군요.
사랑이라는 것도 작업을 막을 수 있는 기한이 7,8일정도밖엔 안되나 보군, 싶더라니까요."
박사의 얘기를 들은 남자는 잠시 멍해있다가 박사를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무슨소리! 저는 그녀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운거구요.
계속 떠오릅니다. 전에는 안그랬는데 자꾸 밤마다 나타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 생각에는 첫번째 경우가 확실합니다."
남자는 이젠 그녀가 지워지지 않아서 화난게 아니라 지워지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아직 사랑하기 때문에, 라고 말하고 있는
박사의 말에 더욱 화가 나있는듯 보였다.
남자의 다그침에 박사는 침착히 말했다.
"당신이 그녀를 정말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녀를 지울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서로 깔끔하게 헤어지면 되는겁니다. 궂이 이 곳에 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을 믿지 못합니다.
그녀에 대한 사랑을 이곳에서 시험하고 있는건지도 모릅니다."
"아니야! 아니라구!... 뭐가 뭔지 모르겠어....."
남자는 박사의 책상에 엎드려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갑자기 머릿속에 무언가가 돌아다니고 있는 듯이 느껴져 매우
어지러웠고, 속까지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박사는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그에게로 가져다 주고, 남자가 안정을 취할 때 까지 가만히 앉아 그를
기다려 주었다.
"자 안정이 됬습니까.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그녀는 당신을 잊었습니까?"
"네. 그런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럼 그것을 확인하러 그녀의 결혼식장도 가셨겠군요?"
"그럴리가요....음? 그녀가 결혼을 했단 말입니까?"
박사는 그의 대답을 예상했다는듯이 이것봐요, 라고 남자에게 말했다.
"제가 기억을 지운 사람의 잔상이 남아있는 경우중, 그 사람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경우라면
빠른 시일내로 그 사람을 자연스럽게 잊어갈거라고 말했었죠?"
"그러셨었죠."
박사는 고개를 돌려 컴퓨터에 다시 무엇을 입력하고 컴퓨터 옆에 있던 스피커의 볼륨을 높였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건 박사와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것을 듣던 남자는 소스라치듯이 놀라고 말았다.
"이거 언제 녹음한겁니까, 제가 그녀의 결혼식을 갔습니까?"
"당신은 불과 30분전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직 그녀를 사랑하고 있고, 지금 그녀를 잊어갑니다."
남자의 안색은 창백해져 갔고 정말 초조해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당신과 그녀는 얼마간의 결혼생활을 했습니까?"
"그건 당연히.....저...그게...그게..."
남자는 다시 박사의 책상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어깨가 들썩들썩거리는게 흐느끼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실은 조금전에 당신의 아내를 만났었습니다."
"얼마전이요? 도대체 언제..."
"당신이 오는 순간 상담을 받고 있던 여자가 바로 당신의 아내입니다. 당신은 알아보지 못했죠.
당신은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고 떠올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잊어가고 있었던겁니다."
"도대체 왜 말해주시지 않으셨어요!"
"아니, 자리에 앉아서 버럭 그러지 않았습니까. 자꾸 떠오른다고. 기억나지 않아야 하는데, 라고."
"크흑..."
남자는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고, 왜 이런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있는데, 점점 질문도, 해야할 대답도
공중분해되듯 뇌에서 어지럽게 흩어져간다.
"그녀가 그러더군요. 자기는 실은 수술하기 10분전 음식을 먹고 왔다고. 사랑하는 남자를 잊을 수 없다며.
그녀는 당신의 유치한 변덕과 의심마저도 사랑했습니다."
박사는 많은 말을 하면서도 전혀 급하지 않게, 또박또박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녀는 당신이 오기전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리고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결혼식에 와준 것에 대해.
그녀는 당신에게 불행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고, 별로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잠시 정지해있던 남자의 어깨가 또다시 들썩 거리기 시작하고 이윽고 그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당신과 함께 했던 나날들을 내게 말해주었습니다.
겨울바람이 불던 7년전의 바닷가. 당신과 함께 맞는 바람, 함께 걷는 모래사장, 그저 당신의 옆에 있는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여자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 목에 걸고 있겠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줬던-"
"루비....목걸이."
라고 남자는 힘겹게 말한뒤 연신 책상을 손으로 쳐대며 목놓아 울었다.
그리고 의자에서 바닥으로 털썩 내려앉아 박사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통곡했다.
"제발...멈춰주세요. 그녀의 기억을 뺏어가는 이기적인 제 자신을 멈춰주세요.
그녀는 어딨나요, 사랑하는 그녀는.."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지금까지 온화하게 말을 이어가던 박사는 순식간에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남자에게 화를 냈다.
"당신은 봤지 않습니까!
결혼식장에서 당신을 보고 뒤돌아서며 떨어진 그녀의 눈물을!
언제나 걸고 있던 그 목걸이를!"
박사의 표정은 암흑을 삼킨듯 점점 어두워져 간다.
"....그리고 나와 팔짱을 끼고 예식장을 나오는 가운데에서도
당신의 이름을 수없이 되뇌이는 걸. 봤지 않습니까..."
박사는 바지에 매달리듯 엎어져있는 남자를 난폭하게 내동댕이 쳐버리고, 옷걸이에
걸쳐져있던 외투를 입고는 사무실을 걸어나갔다.
문을 열고 나가면서 그는 말했다.
"사랑은 아픈겁니다.
그리고 아마, 겁쟁이에게 주어지는 휴식은 더 아플겁니다."
남자의 뇌리에 사랑했던 아내와 꿈만같았던 지난날들의 조각난 영상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박사의 모습도 흐릿흐릿하게 기억 속 어딘가에 자리하는듯 하였으나
그 존재도 점점 희미해져갔다.
넓었던 사무실이 점점 좁아지더니, 그를 잡아먹을듯이 옭아메어온다.
사무실의 불이 꺼지고, 남자의 의식도 점점 흐려져간다.
그의 사랑은 지워져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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