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고.”
입가에 피를 흘리며, 소년이 웃는다.
“드디어 찾았다.”
소년의 입가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벌어졌다. 소년은 웃고 있다.
“……에서 태어난, 최고의 …를!”
소년의 눈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아니, 그런 것 같다.
그렇게 느끼는 순간, 여진은 꿈에서 깨어났다. 부릅떠진 눈으로, 천장을 본다. 여진은 눈을 몇 번 껌벅이더니, 이내 몸을 일으켰다. 여진은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축축하다고 느낄 정도로 땀이 진득하게 흐르고 있었다. 찝찝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 어두컴컴했다. 여진은 시선을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시계로 옮겼다. 분침은 잘 보이지 않아 모르겠으나, 시침은 3을 조금 지나 있었다. 여진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이불 속에서 빠져 나왔다.
여진의 입이 열렸다.
“그걸 본 뒤로는……. 계속 같은 꿈만 꾸네.”
여진은 바닥에 놓인 슬리퍼를 신고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온몸을 에는 듯한 한기가 여진을 덮쳤다. 여진은 갑자기 전해져 오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팔로 몸을 감싼 채 여진은 부엌으로 향했다. 그 꿈으로 인해 잠이 깨고 나니, 도저히 그냥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물이라도 한잔 마시면 괜찮을까, 하는 생각에 부엌에 들른 것이다.
여진은 부엌에 도착하자 왜 이토록 추운지 알 수 있었다. 부엌에 있는 창문 3개가 모두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여진은 늦여름 밤의 차가운 밤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창문을 모두 닫았다. 그제야 한기가 조금 가신 듯했다.
여진은 냉장고 문을 열어 물병을 꺼냈다. 그리고는 식기 건조대 위에 놓인 컵을 집어 물을 따랐다. 반쯤 채워지자, 식탁 위에 물병을 내려놓고 물을 들이켰다. 시원한 느낌이 목을 타고 전해져 온다. 약간 개운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여진은 물을 다 비운 컵을 다시 식기 건조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 순간, 거실에 있는, 고풍스러운 멋을 풍기는 괘종시계의 종소리가 울렸다.
종소리는 모두 네 번 울렸다. 그것은 현재 시각이 네 시를 알리는 시계만의 신호. 여진은 물병을 냉장고에 넣으며 생각했다.
‘아까는 분명히 세 시에서 조금밖에 안 지났었는데……. 벌써 이렇게 됐나?’
여진은 자신의 방에 있던 탁상시계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내 ‘아마 탁상시계가 고장 났겠지’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이거, 이거. 까딱하면 들킬 뻔 했군.”
신성 동맹의 대장로, 라휼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방금 전 그는 한 소녀의 모습을 마법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정말로 그 소녀가 ‘그것’이 맞는지, 만약 ‘그것’이라면 ‘그것’에 맞는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투시안(透視眼)을 발동해 소녀의 몸에 흐르는 마력을 탐색해본 결과, 자신의 투시안으로써는 도저히 측정이 불가능한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판명 났다.
거기다 소녀가 자고 있는 사이 꿈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력의 자아(Ego of magic)'를 의도적으로 투영시켰다. 그로 인한 결과 역시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마력의 자아는 완전한 모습을 갖춘 채로 소녀의 꿈에 나타났다. 그것은 곧, 그녀의 마력이 자신이 가진 마력의 자아를 볼 수 있을 만큼 방대하다는 것을 뜻했다.
한 가지 덧붙여, 마력을 가진 자만이 느낄 수 있는 '마력의 파동(Wave of magic)'을 소리로 구체화 시켜(물론 그런다 해도 마법사가 아닌 일반인은 들을 수 없다) 시계를 통해 소녀에게 들려주었다.
소녀는 그 소리를 들었다. 소녀가 마력의 소유자라는 게 한 번 더 판명되었다. 게다가 소녀가 소유하고 있는,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마력의 양은 그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라휼은 의자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짐짓 2 미터는 족히 넘을 것 같은 크기의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들어왔다.
여인의 몰골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입고 있는 순백색의 옷은 무언가에 의해 뜯겨져 있었고, 얼굴을 가리기 위해 옷에 달려 있는 후드는 반 이상 날아가 있었다. 탐스럽기 그지없던 금발도 먼지를 반쯤 뒤집어써서 생기를 잃은 듯했다. 그런 여인의 손에는 기다란 손잡이가 달린 망치가 들려 있었다.
여인은 라휼이 앉아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라휼은 자신에게로 걸어오고 있는 여인을 보며 반색했다.
“어서 와, 마리화나. 사흘만인가?”
금발의 여인, 마리화나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말투를 좀 고치는 게 어떻겠나, 라휼? 너의 직분을 생각해서라도 말이지.”
라휼은 그녀의 말을 듣고는 피식 웃었다.
“그러는 너도 고치는 게 어때? 너무 딱딱하다는 생각 안 들어? 뭐, 그 빌어먹을 녀석들을 만날 때는 전혀 그렇지 않다만.”
그는 ‘빌어먹을 녀석들’이란 부분에서 강조해 말했다. 라휼의 말에, 마리화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대뜸 화를 내며 언성을 높였다.
“너란 녀석은 정말 상종 못할 종자로군.”
“어이, 어이. 말이 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래도 명색이 신성 동맹의 대장로인데 말이야.”
어딘지 모르게 섭섭하다고 말하는 듯했으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라휼은 웃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그런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듯.
마리화나가 한 마디 더 거들었다.
“너 같은 녀석에게 친절 따위를 베푸는 것은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나 참.”
라휼은 실소를 흘리고는 다시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둘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라휼은 눈을 감은 채로 미소 짓고 있었다. 반면에, 마리화나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결국, 그녀는 정적을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보고할 게 있다.”
“보고?”
뜻밖의 말에, 라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명히 자신에게 또 한 소리하기 위해 말을 꺼낸 줄 알았다. 그런데 보고라니.
라휼은 눈을 뜨고 마리화나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의 표정은 자못 심각했다. 평소 그녀라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녀는 언제나 무표정했지만, 화를 내거나 심각해 하지는 않았다. 라휼은 입가에 머물던 미소를 지우며 말했다.
“말해.”
“수호자를 제외하고…… 검을 쓰는 다른 존재를 아는가?”
“뭐?”
마리화나의 말에 라휼이 반문했다. 다른 존재라니. 당최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라휼이 의문이 가득 담긴 표정을 짓자, 마리화나는 침음을 흘렸다.
“어제 그 존재와 격돌했다.”
“……솔직히 말해서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처음부터, 다시 설명 좀 해주겠어?”
라휼이 마리화나에게 부탁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어제 ‘그 존재’와 있었던 일을 라휼에게 말했다.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라휼의 표정은 점점 어둡게 변해갔다. 결국 이야기의 종반에 다다라서는 고개까지 아래로 떨어트렸다.
마리화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라휼에게 물었다.
“혹시……. 그 존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건 없나?”
라휼이 고개를 저었다.
“전혀. 그런 존재에 대한 건 오늘 너한테 처음 들었다. 도움이 되질 못해서 미안하군.”
그렇게 말하며, 그는 다시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휼의 입이 힘겹게 열렸다.
“……할 수 없군.”
“무슨 소리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마리화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라휼은 감겨 있던 눈을 살그머니 뜨며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마리화나.”
라휼이 사글사글하게 말했다. 마리화나는 퉁명스럽게 그 말을 받았다.
“마법사의 금기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겠다.”
“마법사의 금기는 아니야. 다만, 다른 생명체에게 있어서는 금기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말하며, 라휼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어찌 보면 잔혹해보이기까지 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라휼의 모습에, 마리화나는 몸을 흠칫 떨었다. 자주 볼 수 없는 친구의 모습이지만, 이렇듯 보기만 한다면 오금이 저릴 정도의 공포감을 맛보게 된다.
마리화나는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말했다.
“그게 대체 뭐지?”
라휼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벌어진 틈 사이로, 새하얀 라휼의 치아가 보였다. 유난히 날카로운 그의 송곳니가 마리화나를 더욱 떨게 만들었다. 라휼은 이빨을 드러낸 채 웃으며 말했다.
“어린아이……. 납치랄까?”
라휼이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주위의 시간이 마치 정지된 듯한 느낌을 받은 마리화나였다. 아까까지 온몸을 지배하던 공포심은 어디로 싹 달아나고, 오로지 혐오감 비슷한 느낌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차지했다.
라휼도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았는지 한껏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이건 그런 뜻이 아니라.”
라휼이 변명할 여지도 없이, 마리화나가 세차게 비집고 들어왔다.
“마법사의 금기는 아니지만. 흠. 변태 자식.”
“그, 그게 아니라니까.”
라휼은 마리화나의 오해를 풀기 위해 장장 20분 동안 그녀에게 자신이 했던 말의 진짜 의미를 설명해야 했다. 라휼의 설명에 마리화나는 어느 정도 수긍했다. 그럼에도, 마리화나는 아직도 라휼의 말을 100% 다 믿지는 않았다. 원래 한 번 산 오해는 쉽게 풀어지지는 않는 법이란 말이 그대로 적용되는 순간이었다.
마리화나는 가늘게 눈을 뜬 채 말했다.
“그러니까……. 그 소녀가 마력의 경계에서 태어난 아이란 건가?”
“그렇지.”
“그리고 그 소녀를 납치하라는 게 네 말이고.”
“그렇지! 이제야 말이 통하네.”
마리화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찌그러트렸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왜 하필이면 그 소녀를 납치하려는 거지?”
라휼이 그 말을 받아 대답했다.
“설명하자면 조금 긴데, 들어주겠어?”
마리화나는 화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라휼은 그런 마리화나의 대답에 어깨를 으쓱하고는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이야기하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말이야.”
라휼은 도중에 말을 끊고 마리화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 소녀는……. 반드시 우리가 손에 넣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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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바람이 왜 이토록 심하게 부는 건지요.
게다가 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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