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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CR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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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7.09.23 14:00:19 조회: 1,211 추천: 1 |
눈을 떴다. 물론, 내 의지에 의한 건 아니었다. 저 빌어먹을 싸구려 커튼은 햇빛을 가리는 데 있어서는 전장에서의 말레이시아산 케블라 방탄복만큼이나 효과가 없다. 게다가 저 알록달록한 무늬라니. 도대체 저건 누구의 취향인가. 혹시 이 싸구려 호텔(계속 싸구려라는 말을 써서 미안한데, 외국인 전용 카지노가 있다는 이유 하나로 라스베가스라는 이름을 멋대로 갖다 붙인 이 호텔은 이 작은 나라에서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의 총지배인인 프레드? 아니다. 프레드라면 알록달록한 커튼 대신 잘 손질한 아프리카산 흰코뿔소 가죽을 창문에다 둘렀을지도 모른다.
호세 꾸에르보를 세 병(세 병까지만 기억이 난다)이나 비워서 머리가 빠개질 것처럼 아픈데 이런 생각이 술술 흐르는 게 스스로도 신기했다.
머리는 아프고, 혓바닥은 입천장에 달라붙을 것만 같다. 목이 타오른다.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일어서서, 냉장고로 가 물병 입구를 입에 대고 한참을 마셨다. 이제야 정신을 좀 차릴 수 있을 것 같다.
침대에선 벌거벗은 금발머리가 아직도 자고 있다.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난다. 어제 밤 오사마가 운영하는 바에서 아담과 호세 꾸에르보를 비우고 있을 때,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있던 세 명 중 하나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제나? 안나?
나는 그녀에게로 가 등을 살짝 두드리며 외쳤다. “조안!” 금발머리가 약간 몸을 꿈틀거린다. 다시 한 번. “이봐, 조안!” 그녀가 내 목소리에 첫 반응을 보였다. 눈은 계속 감고 있는 채로.
“재클린이야… 지금 몇 시?”
“나도 몰라. 배가 출출해질 때는 됐지.”
나는 럭키스트라이크를 한 대 피워 물고, 과음으로 푸석푸석하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는 조안… 아니, 재클린에게도 한 대를 권했다. 그녀는 사양했다. 천천히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는 이불을 몸에 휘감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내 이름이 그렇게 어려워? 후훗. 그러고 보니… 우리, 통한 구석이 있는 것도 같애. 나도 자기 이름이 뭐였는지 헷갈려. 스미스? 제임스? 로버트?”
“…케이.”
“이니셜?”
“편할 대로 생각하길.”
내가 생각해도 하룻밤 살을 섞고 난 남녀가 나누는 대화 치고는 참으로 건조하다. 약간 어색하기도 했다. 나는 인터폰의 수화기를 들었다.
“굿모닝, 미스터 케이. 잘 주무셨습니까?”
“조지? 나한테 그렇게 깍듯이 대할 필요 없다고 했는데.”
“죄송합니다. 미스터 케이.”
이 싸구려 호텔도 호텔이라고, 이런 곳에서 15년이나 근무를 하다 보면 조지가 지금 나한테 보여준 것 같은 가식적인 친절이 몸에 배는 모양이다.
“프레드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수화기 너머에서 익숙한 전자음으로 이뤄진 멜로디가 얼마간 흐르고, 역시 그만큼 익숙한 걸진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여~! 케이. 허리는 괜찮아? 하하하.”
“아침부터 썰렁한 농담 하지 마.”
“지금이 아침이라고? 자네가 맨날 싸구려라고 놀리는 치벨라 공화국 최고의 호텔 라스베가스에도 영업 방침이란 게 있다네. 케이 자네만 아니었으면 벌써 두 시간 전에 인터폰을 울려서 강제로 체크 아웃을 하게 했을 거야.”
“그럼 지금이 벌써 두 시?”
“그래, 이 잠꾸러기야.”
“아담은?”
“아담? 어제 자네하고 그 귀여운 금발머리 아가씨를 방에 데려다 놓고는 알버트하고 한 잔 더 해야 되겠다고 나가던데?”
프레드와 싱거운 농담 몇 마디를 더 던지고 인터폰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 분명히 이 시선은 나를 향하고는 있지만,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 용병 생활 3년으로 얻은 재산은 이렇게 목숨을 어떤 식으로든 부지하는 알량한 감각뿐이다.
“왜 그렇게 날 쳐다봐?”
“어제는 몰랐는데, 자기, 눈이 검은색이네. 혹시 아시아 출신이야?”
“편할 대로 생각하시길.”
금발머리는 더 자겠다고 하면서 금방 잠에 빠졌다. 나는 럭키스트라이크를 한 대 더 피우고 난 다음 샤워를 마치고 호텔방을 나왔다. 메인 로비의 조지와 프레드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후 주차장으로 가 내 랜드로버에 시동을 걸었다.
내가 있는 이곳은 아프리카의 치벨라 공화국. 지난 2001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했으니 그 이름을 갖게 된 게 올해로 정확히 30년 째다. 이곳의 대통령 제임스 은구아니의 사설 경호 업무를 맡은 지 10개월. 군 장성 출신이면서도-그리고 쿠데타로 집권을 했으면서도-은구아니 대통령이 자신의 경호를 용병들에게 맡긴 게 아이러니하기는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원래부터 중앙의 정치인이나, 혹은 정규군보다 지방 군벌들의 위세가 더 큰 게 아프리카의 전통이며 이곳 치벨라 공화국도 마찬가지다. 다만 지금의 은구아니 대통령은 치벨라 공화국 영토 내의 군벌들에게 적당히 자치권을 주면서 그들을 다스리는 기술을 안다. 제대로 된 정치적인 감각의 소유자라고나 할까? 따지고 보면 그런 것도 군대에서 배웠을 것이다. 항간에는 군벌들의 약점을 손에 쥐고 있다고 하는데, 일단 경호 업무만 총괄하는 나로서는 그 외의 사항은 관심 밖이다. 하여튼 몇몇 굵직한 군벌들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면,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보좌하는 경호원들을 용병으로 채우는 것이 이치에 맞다.
그런 내 경력에 큰 오점을 남길 뻔한 일이 3개월 전에 있었다. 젊은 신흥 군벌인 오캄포가 은구아니 대통령을 암살하려 한다는 첩보가 입수된 것이다. 내가 소속된 ‘민간군사기업’(일단 표현은 그렇지만 이 회사의 본래 업무는 인류 역사에 기원전부터 존재했던 용병부대라는 건 세 살 먹은 꼬마도 아는 사실이다)인 아르곤 네트웍스의 정보 라인을 통해, 오캄포는 북부 산악 지역에 은거하고 있으며, 위험 요소의 사전 제거 원칙에 따라 오캄포의 아지트를 습격하는 작전을 시행했다.
오캄포 휘하의 어린 병사들은 기껏해야 두 세대 전의 유물인 AK47 정도나 휘두르는 수준이었지만, 해쉬쉬를 한 채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 나와 알버트가 이끄는 부대원들을 곤란에 빠뜨렸다. 그 때 만난 게 바로 아담이다.
이곳 치벨라 공화국의 속담 중에, 오캄포의 아지트가 위치한 북부 케골 고원 지역의 날씨는 ‘대지의 여신이 관장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변화무쌍한데, 그날 따라 엄청난 모래바람이 불어대는 와중에도 아담 가르시아의 M24에서 발사된 탄환은 정확히 오캄포의 이마를 꿰뚫었다. 오캄포의 소년병사들은 자중지란에 빠졌고, 우리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캐나다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아담을 재빨리 이 먼 아프리카까지 보낸 것은 아르곤 네트웍스가 가진 정보력과 기동력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대지의 여신이 관장하지 않는 날씨까지도 계산에 넣고서 회사 소속 최고의 스나이퍼인 아담을 이번 작전에 기용한 것이다.
사실 말은 많이 들었지만, 아담의 솜씨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아담에 관해서는 회사 내에 전설처럼 떠도는 말이 많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스콜이 몰아치는 가운데 1Km 밖의 적을 튜닝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구형 M14의 단 한 발로 제거했다는 말도 있고, 한 번 은신하면 열흘 동안 새벽 이슬만 마시면서 목표물을 기다린다는 이야기도 있다. 더군다나 그는 6개월에 한 번씩 치르게 되어 있는 아르곤 네트웍스의 개인 업무 수행 능력 평가에서 지난 6년 동안 회사 전체 내 1등을 놓친 적이 없다. 물론, 용병 생활 1년 만에 회사의 전체 개인 평가에서 아담에 이어 2위를 차지한 나도 나름대로 회사 내에서는 유명한 존재다.
현재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동시에 최대 규모인 민간군사기업, 아르곤 네트웍스의 전설적인 존재 둘, 아담과 나는 그렇게 처음 만났고,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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