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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CR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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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7.10.08 04:42:55 조회: 862 추천: 0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아르곤 네트웍스의 본사. 변변한 간판조차 없고, 일견 흔하디 흔한 무역회사처럼 보이기만 하는 것은 회장인 잭 바벤코가 의도한 바이다. 일반 소비자가 만족하는 제품을 판매하는 회사도 아닐뿐더러, ‘이 쪽 바닥’의 의뢰인은 노출을 꺼릴 수밖에 없고 대부분 얼굴도 볼 필요 없이 대리인을 통해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하여튼 아르곤 네트웍스의 본사는 공식적으로 전세계 민간군사용역 분야의 60% 넘게 차지하는 매출을 해마다 올리고 있고, 그와는 별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각종 뒷거래와 로비로 천문학적인 부를 벌어들이고 있는 회사의 상황과는 아주 딴판인 것이다.
볕이 잘 드는 3층 회장실. 푹신한 안락의자에 앉은 잭 바벤코의 표정은 뭐라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다. 때로 검지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대고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는 듯하기도 하고 화가 나는 듯 보이다가도 금세 평온해지기도 했다. 어쨌든 별 특징이 없는 그의 외양은 전체적으로 무표정이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임스 은구아니, 보통내기가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베팅 단위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그의 뒤편으로 흐트러짐 없이 서 있는 검은 정장 차림의 비올라는 마치 마네킹처럼 표정이 없었고, 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있는 회사의 고문 변호사는 서류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번엔 변호사가 입을 열었다.
“은구아니 대통령의 발표 내용은 전부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게 사실이라는 게 더 놀라울 정도긴 하지만 말이죠.”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 달라졌다고 해도 말이야…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게 있어. 놈은 그걸 모르고 있다고.”
회장의 이 말에 변호사는 대략 눈치를 챈 듯했다.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서류를 정리해 가방 속에 넣기 시작할 때 바벤코가 물었다.
“이 보게, 제닝스, 현지에 파견된 요원들 중에서…”
“텔아비브에서의 작전 말씀하시는 거군요?”
제닝스라 불린 변호사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미 파악은 끝났습니다. 약 40% 정도의 요원만 가치가 있을 겁니다. 일단 은구아니 대통령의 경호 총 책임자인 케이 요원은 ‘로드킬’ 작전을 잘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 젊은 친구야. 그 나이 땐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거든. 실수 없이 처리하도록.”
“알겠습니다.”
변호사가 서류를 가방에 모두 챙겨 방을 나갔다. 이어 잭 바벤코가 뒤를 돌아보며 비올라에게 물었다.
“비올라, 지금 워싱턴은 몇 시지?”
“오후 11시 15분입니다.”
비올라의 대답은 마치 기계음처럼 아무런 고저장단이 없이 흘러나왔다. 잭 바벤코가 리모컨을 들고 버튼을 누르자, 고흐의 작품이 걸려 있던 벽면이 스윽 움직이더니 그 뒤의 커다란 LCD 화면에 전원이 들어왔다. 이어 무선 키보드의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는 60대 정도로 보이는 백인 사내가 책상에 앉아 넥타이를 풀어헤친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베이커 대통령 각하, 안녕하십니까?”
로이드 베이커. 그는 미합중국의 대통령이다. 2030년 현재 미국은 공화당이 집권하고 있는데, 로이드 베이커 대통령은 7년 전 보수층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연임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연임 직후부터 만성적으로 누적된 재정 적자를 타파하기 위해 기존의 노선에 반하는 증세 정책을 펴면서 기존의 지지층으로부터도 환영을 받지 못하고,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는 노골적인 냉대를 받으며 사면초가에 처해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지금 민주당은, 벤처 기업가 출신으로 부를 일궜으며, 캘리포니아 주지사 시절 당시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능력을 보였던 헨리 와이즈만을 일찌감치 차기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낙점하고 베이커 현 정부의 실정을 공격하고 있다. 넓은 LCD 화면에 나타난 베이커 대통령의 피곤한 표정에는 그를 둘러싼 이와 같은 모든 상황이 집약되어 있었다.
“바벤코 회장, 오랜만이오.”
“미스터 프레지던트, 담배는 끊으신 걸로 알고 있었는데요? 후후후.”
잭 바벤코는 어딘가 비아냥거리는 투로 베이커 대통령에게 농을 던졌다. 베이커 대통령이 양미간을 찌푸리고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 말했다.
“미스터 바벤코, 이곳 백악관의 내실 화상전화에 직통으로 연결된 라인을 갖고 있는 사람은 내가 담배를 끊지 않았다는 걸 다 알고 있는데 무슨 소리요.”
“아, 그저 농담을 한 겁니다. 그런데 각하,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계속 능청이군.”
잭 바벤코가 상대편으로부터 뭔가를 이끌어낼 필요가 있는 대화를 나누는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그는 우선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 만큼만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농담을 던진다. 그렇게 해서 상대를 무장해제시킨 다음, 상대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판단했을 때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린다.
“아프리카 지역 담당 보좌관인 해롤드로부터 보고는 받으셨습니까?”
“치벨라 공화국 말이군. 받았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생각한다고 얘기해야 할까?”
베이커는 화상전화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치벨라 공화국 국가원수의 의지를 높이 산다고 해야 할까? 그런 대답을 원하시나? 미스터 바벤코.”
역시 베이커 대통령 또한 노련한 정치인이다. 정작 중요한 이야기, 게다가 자신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는 내용의 이야기를 결코 자신의 입으로 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오게 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계산은 이미 바벤코 또한 머릿속에 넣고 있었다.
“게임에서 이기는 자는 돈을 따는 자가 아닙니다. 돈을 딴 자가 훌훌 털고 일어나지 않게끔 판에 계속 눌러앉게 만드는 것도 테크닉이죠. 미스터 프레지던트.”
“또 카드 얘기로군.”
“때로는 카드를 버려야 할 때도 있고, 히트를 해야 할 때도 있는 거죠.”
“지금은 어떤 때라고 보는 거요?”
“지금요? 지금은 바로 딜러도 바꾸고, 베팅 단위도 올려서 새 게임을 시작할 때가 아닐까요?”
워싱턴의 로이드 베이커와 암스테르담의 잭 바벤코. 둘은 수천 킬로미터와 시차의 사이를 두고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판돈을 준비하라는 얘기군, 바벤코.”
“잘 아시겠지만, 게임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패는 다이아몬드 킹입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이렇게 불공평한 딜러를 두고 하는 게임은 또 없을 거야.”
잭 바벤코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음을 지었다.
“세상이 원래 그런 겁니다. 잘 아시잖습니까?”
일주일 후, 치벨라 공화국 북서부의 노이아 사막. 칠흑같이 어두운 밤. 미 육군 소속의 최신예 무음 수송 헬기들로부터 치벨라 공화국 국경 부근에 사막색 군복과 프로텍 헬멧, 케블라 방탄복과 M4 카빈과 야간 투시경으로 무장한 델타 포스 대원들을 내려놓았다. 그들은 수송 헬기에서 조립 부품을 끌어내 사막에서 이동이 가능한 경량 버기 차량을 조립했고, 어둠이 채 가시기 전에 어딘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치벨라 공화국 대통령궁의 내실. 은구아니 대통령과 케이가 마주하고 있었다. 은구아니 대통령은 느긋한 표정인 반면, 케이는 잔뜩 긴장한 채 초조해하는 모습이 대조적이었다.
“자넨 내 뜻을 이해하지?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은구아니 대통령이 케이에게 물었다.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명령대로 움직이며, 각하의 위해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제 가장 큰 임무입니다.”
“현재로서는 그렇다는 거겠지.”
은구아니 대통령이 커피 메이커에서 손수 커피를 따르면서 말했다.
“이럴 땐 군대 시절 끊은 담배 생각이 간절하단 말이야…”
케이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각하, 사실은… 사실은, 회사로부터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무슨 내용인지 알 것 같군.”
“지금 이러고 계시면 위험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벤코 회장이, 그리고 미국의 베이커 대통령이 각하에게 유쾌한 결정을 내릴 사람들이 아니라는 건 각하도 잘 아시잖습니까? 일단 안가로 이동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나 은구아니 대통령은 여전히 느긋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마주쳐야 할 일이야. 이런 부분을 미리 계산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하지만 각하…”
“내가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케이 자네 아시아 출신인가?”
“그렇습니다.”
“처음에 검정색 눈을 보고 알았지. 내가 전에 아프리카에 대해서 얼마나 아느냐고 물었던 것, 기억하나?”
“예, 그렇습니다.”
“그래, 공부는 어느 정도 했나?”
“짧은 시간에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의도했던 건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케이의 대답에 은구아니 대통령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근대사에서 아프리카만큼 극심한 침략과 수탈을 경험한 곳이 바로 아시아지? 그건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그래서 자네가 내 생각에 동의할 거라고 짐작하고 있고.”
“하지만, 바로 각하가 제2의 마하트마 간디나 제2의 시몬 볼리바르가 되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있어. 있고 말고.”
은구아니 대통령이 어두운 창 밖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간디나 볼리바르나 훌륭한 위인이긴 했지. 당시에는 말이지. 그들의 높았던 의식도 존중해. 하지만 지금은 그런 순진한 사상이 먹히는 세상이 아냐.”
케이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면서 은구아니 대통령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내가 지금 가진 건 인류 역사 이래 2천 년이 넘게 가장 큰 위력을 발휘했던 거야. 고대 왕국끼리의 전쟁? 십자군 원정? 세계 대전? 모두 돈 때문에 일어난 것 아닌가? 돈이 말하는 세상에서 나는 지금 가장 큰 발언권을 갖게 됐고, 나는 그런 기회를 버리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 기회를 이곳 치벨라 공화국과 아프리카를 위해 쓸 거고.”
순간, 케이가 귀에 걸고 있는 무선 통신 시스템에 무음 경보가 들어왔다. 케이가 짤막하게 보고를 받은 후 은구아니 대통령에게 말했다.
“각하, 오딧세이 미사일 기지에 델타포스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방공망부터… 철저하게 시작하는군.”
“일단 가족 분들과 함께 안가로 모시겠습니다.”
케이와 은구아니 대통령은 급하게 내실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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