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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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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7.10.27 17:34:58 조회: 839 추천: 0 |
[13]
여기저기 레이스가 달린 파란 드레스. 가슴 부분에 작은 리본이 달려있는데 이또한 짙은 파란색으로 전체적인 모습에서 보면 꽤 어울린다. 문제는 지금 이 숙녀용 드레스를 입어야 할 사람이 나라는 사실이다.
"...이걸 입으란 건가...?"
나는 스스로에게 정말 이것이 현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질문했다. 그러니까 서쪽의 마수로 불리는 적홍의 요괴 키세아나자드가 귀여운 파란색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는 말이지? 레이스로 장식된 어깨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요괴인 내가 인간들의 패션을 이해하고 있을리 만무한데도, 나는 이것을 보고서 촌스럽다고 느끼고 있다. 나는 팔길이를 훨씬 넘겨선 사이즈에 한숨이 나오기 시작했다. 여관 주인에게서 빌려온 걸보니, 아무래도 이 옷은 그 여자가 젊었을 때나 입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유행이 한참 전에 지난 옷일 것이 뻔하다. 넬 녀석은 나에게 옷을 전해주고서 나가버렸다. 아무리 녀석이라도 숙녀가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멍하니 보고있을 순 없겠지.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녀석은 속옷까지 빌려와 버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이런걸 전해주고 가다니, 무신경한건지 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어쩌면 묘하게 음흉한 구석이 있는지도 모르지. 속옷까지 레이스라니, 주인 여자의 취향도 참... 겉옷 안에 입는 천조각은 여제껏 별로 볼일이 없었다. 인간의 예법이란 것은 이상하다. 속옷이란 것을 보이면 창피해하면서도 애써 예쁜 것을 고르려고 한다. 인간이 아닌 나로써는 그 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가 훔쳐보고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주변에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진 않았지만 말이다. 문제의 드레스를 침대 위에 올려두고 나는 입고있던 망토를 벗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무방비한 피부가 드러난다. 이것은 내가 뒤집어 쓰고있는 소녀의 가죽. 신체를 이 껍질에 최적화 시킨 채로 끼워맞췄다. 이음새같은게 있을리 없다. 나는 꽤 공들여서 위장을 하고 있으니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나는 결국 속옷을 모두 갖추어 입었다. 처음 보는 의류라해도 기본적인 지식은 가지고 있었다. 상의를 입고서, 하의를 입는다. 상체의 가슴을 가리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있다.
하의의 경우 몸에 딱 들러붙는 기분이 이상하다. 드레스는 팔 길이가 맞지 않을 정도로 헐렁했는데도, 속옷은 비슷한 사이즈라니. 이 파란색 드레스는 본래부터 소매부분이 손을 가리도록 되있는 건가? 나는 곧 침대 위에 올려둔 것을 집어들었다.
"...어떻게 입는거지 이거?"
괜히 막막해진다.
키리아는 몇십분이나 그것을 어떻게 입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했다. 키리아가 늦자, 주인 여자가 그녀의 방에 들어갔다. 결국 키리아는 여관 주인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레이스가 달린 파란 드레스를 착용할 수 있었다. 별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그 드레스는 여관 주인의 딸이 입었던 옷으로 지금은 작아서 입지 못하던 옷이라고 한다. 당시에 꽤 비싸게 구입했던 물건이라 버리는 것도 아까워 옷장 안에 모셔두었는데 비로소 쓸 일이 생긴 것이다.
"와...아..."
넬의 입에서 나온 감탄사였다. 어벙한 표정으로 키리아를 바라보고있다. '뭘 보는거야, 멍청아.'하고 키리아는 속으로 넬을 욕했다. 하지만, 넬의 시선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처음 입어보는 소녀다운 옷인데다, 그것을 본 넬의 반응이 의외였기 때문이다. 키리아는 무표정으로 '자, 갑시다.' 하는 정도의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했다. 푸른 레이스 드레스는 키리아양에서 잘 어울렸다. 보라색 머리카락에 대조되는 파란색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크게 어필한다.
"흠흠...!"
계단을 내려오는 키리아의 뒤로 여관의 여자주인이 모습을 들어냈다. 주먹을 쥔 손으로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한다. 넬에게 살짝 신호를 보낸다. 필시 '여자 아이의 꽃단장 보고서 뭔가 할 말 없나요?' 라는 의미일 것이다. 넬이 서있는 계단 아래까지 들릴 만큼 그 소리는 컷다.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고있는 몇몇 남자들이 그것을 보고서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넬도 곧 그 의도를 파악하고서 무언가 말하려한다. 그러나 키리아만은 여관 주인이 감기에라도 걸린건가,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아, 음... 그러니까..."
숫기없는 어리숙한 태도를 보여주는 갈색머리 견습사제. 다시금 주인 여자가 신호를 보냈다. 넬의 행동이 답답했던 모양인지, 이번에는 기침 소리가 아니라 손을 입에 가져다대고서 어서 말하라는 강압적인 모습이다. 키리아는 넬을 보고서 눈빛을 빛냈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에 흥미가 발동한 것이다.
"네에?"
살며시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넬에 앞까지 걸어간다. 넬은 머리를 곤란한 미소를 짓고있다. 주위의 남자들도 조용히 넬의 대사를 기다린다.
"그 드레스, 잘 어울리네요."
자기가 한말에 쑥스러워하며, 뒤통수를 글적였다. 키리아는 순간 경직되었다.
"아? 아아...?"
어느정도 예상은 하고있었지만, 넬에게서 그런 소리를 직접 들어버리니 키리아는 혼란에 빠지고말았다. 여관 주인이 두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 '풉.' 하고 웃었다. 키리아는 그 소리를 포착했지만, 넬은 알리가 없었다. 아랫층 남자들의 '워어-' 라는 환호가 들려왔다. 키리아의 창백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넬 녀석의 성격상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할리는 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키리아는 당황스러워졌다. 혈액의 흐름따위가 없는 키리아의 얼굴이 붉어진 것은 아무래도 체내의 온도가 급격히 상승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 아뇨."
말까지 더듬어버렸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서 예법을 갖춰 넬에게 대답했다. 그리고서 키리아는 넬을 그냥 지나쳐버렸다. 넬은 여관 주인과 식사 중인 남자들에게 살짝 목례하고서 소녀를 뒤쫒아간다. 키리아는 인간에게 휘둘리는 것 같아서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진 않았다.
'잘어울린다니...'
키리아는 지금 넬에게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않았다. 느닷없이 소녀의 순정이라도 생겨버린 건지, 속으로 넬이 한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다.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었다. 여제껏 자신에게 접근하는 녀석들은 하나같이 속이 시커먼 녀석들이었다. 키리아는 스스로의 외모가 인간들이 바라보기에 아름답다고 느낀다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그래서 먹이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것을 이용했다. 그것이 인간을 모습을 가지고 있는 이유의 전부였다. 그런데도 옷이 잘 어울린다는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에 키리아는 동요하고 말았다. 키리아는 이게 자신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에 우울해졌다. 자신이 인간이 아닌 괴물이라는 사실은 언제나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드레스가 어울린다고 말했던 넬이 가리키는 것은 키리아의 본 모습이 아닌 껍대기. 키리아는 화끈거리던 얼굴은 거기서 무표정으로 되돌아와버렸다.
'그 녀석이 말한건 진짜 내가 아니잖아. 멍청하긴...'
어디까지나 자신이 인간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되세기며, 키리아는 순간이나마 넬의 칭찬에 마음이 흔들린 자신을 어리석음을 반성했다. 키리아는 넬에게서 등을 돌리고 떨어져 걷는다.
[탁 탁]
여관 주인이 드레스와 함께 빌려준 파란색 구두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키리아의 걸음을 따른다. 평소의 키리아 라면 기척을 숨기고서 조심스러운 걸음을 유지했을텐데, 지금 그녀는 일부러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보행을 즐기고 있다. 키리아는 왠지 무방비하게 움직여보고 싶었다. 주위에 무엇에게도 경계하지 않고서, 그저 걷고싶었다. 넬의 시선이 느껴지지만 상관없었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빛이 눈부시다. 키리아는 태양이 비춰지는 시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많은 것들에게 자신의 모습이 노출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넬이 칭찬해준 자신의 모습을 보다 많은 존재들에게 보이고싶었다. 설사 이것이 자신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살짝 뒤를 돌아본다. 지금 키리아의 걸음 만큼이나 무방비한 넬의 모습이 보인다. 키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어버렸다. 여지껏 보여주던 조롱과 장난스런 웃음이 아닌, 순진한 소녀의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넬씨."
키리아는 조용한 목소리로 넬을 불렀다. 좀처럼 남에게 먼저 말을 건넨 적이 없는 키리아의 느닷없는 부름에 넬은 당황했다.
"네, 네에?"
대답이 늦었다. 하지만 키리아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가 대답하든말든, 그녀는 말을 이어갈 생각이었다.
"고마워요."
넬은 보았다. 태양광의 황금빛이 비치는 한폭의 그림과 같은 배경, 그 중심에서 소녀다운 미소짓고 있는 키리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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