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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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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7.10.26 21:44:09 조회: 902 추천: 0 |
[11]
넬은 키리아에게 말했던 금방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문을 열고서 방에 들어가자 넬이 나갔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는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서 책을 보고있는 키리아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그와는 다르게 넬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나갔을 때 입고있던 사제복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않고, 십자가가 수놓아진 셔츠를 입고있다. 키리아는 넬 눈동자에서 묘하게 슬픈 빛이 드러나는 것에 의아했다. 넬에게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감정의 변화를 키리아는 놓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웃고있지만, 느낌이 약간 달랐다. 필시 소녀를 신경쓰고서 억지로 밝은 모습을 보이려는 것이다. 그러나 넬의 연기는 키리아의 거짓 웃음보다도 어색했다. '다녀왔어요.'하고 말하는 넬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소녀의 예리한 청각이 포착해냈다. 심박수도 평소와는 다르다. 그런 주제에도 키리아를 마주하고서 애써 미소를 유지하고 있다. 키리아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제멋대로 남을 걱정하는 주제에, 자기는 걱정받지 않으시겠다? 볼 수록 이해가 안되는 인간이네.'
키리아는 넬의 행동에 다시금 혼란에 빠졌다.
"날씨가 많이 싸늘하더군요."
어색한 침묵을 깨고자 넬은 키리아에게 말을 건네었다. 계속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있는 소녀의 시선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예에."
키리아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시선은 여전히 넬의 얼굴을 향하고서, 넬의 멍청함에 대해서 머릿속으로 되뇌이고 있었다. 이 소녀는 생각에 빠져서 자기가 누군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있다. 넬은 곧 그 사실을 눈치챘다.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것까지는 알 턱이 없겠지만. 넬은 다시금 키리아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이성이 자신을 멍하니 보고있자니, 쑥스럽기도하고 뭔가가 어색했기 때문이다.
"저기... 키리아양?"
"네?"
넬의 갑작스런 부름에도 불구하고 키리아는 어떨결에 대답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오른쪽 뺨을 긁으며, 키리아에게 '어째서 절 보고있는 겁니까?'의 의미가 담긴 질문을 던졌다. 키리아는 잠시 '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다 다시 고개를 원래대로 돌리더니 '아!' 하고 넬의 의도를 알아챘다.
"아, 아뇨."
키리아는 한박자 늦게 넬에게 답했다. 소녀의 모습에 긴장감이 풀어진 넬은 속으로 실소를 터트렸다. 키리아는 왠지모를 패배감에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아아, 내가 뭐하러 이런 이상한 인간에게 말려들었을까?'
살며시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그러나 살짝 넬을 노려본다. 얼빠진 표정으로 해실거리는 갈색머리 남자가 보인다. 괜시리 키리아는 불쾌해진다. 하지만 넬을 죽이고 싶은 생각은 들지않는다.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까지 다른 생물을 쳐죽이는 것에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던 키리아가 심기가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죽이지 않는 다는 것이 말이다. 넬의 무방비한 얼굴을 보고있자니, 살의가 모두 사라져버린다. 그 이전에 죽이기도 귀찮은 상태. 키리아는 뱃 속에 들어있는 음식물들을 소화시키는 과정에서 나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분명히 배가 불러서 그런 걸거야.'
키리아는 결국 식욕이 없는 상태라 넬을 죽일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결코 넬의 페이스에 휘말려서 동요했다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리저리 노려보다, 한숨을 쉬었다를 반복하는 키리아의 모습을 본 넬은 그저 웃음을 참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웃어버리면 소녀가 버럭하고 화를 낼 것 같았다.
'얼래...?'
넬은 자신에게 생긴 변화를 뒤늦게 눈치챘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우울하던 기분이 날아가 버렸다. 소녀의 귀여운 모습을 보고있자니, 어느새 원래대로의 넬로 돌아와버린 것이다. 지그시 소녀를 바라본다.
'그래, 지금은 이미 죽어버린 사람보다 살아남은 한명이 소중하니까...'
지금 넬이 느끼고 있는 것은 지키지 못했다는 절망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도 아니었다. 단지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소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하늘이 짙은 남색으로 서서히 물들어간다. 마을의 어린 아이들은 저녁시간에 맞추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지 오래였고, 낮부터 일하던 어른들도 슬슬 자신의 보금자리로 향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자 하나 둘씩 꺼지기 시작하는 촛불들이 보인다. 평화롭게 잠들어가는 마을을 가리키는 듯이 달빛이 약하게나마 대지를 비친다. 전날밤에 다섯명이 잡아먹히고, 두명이 찢겨죽었다고는 상상이 가지않을 정도로 마을은 고요했다.
"쳇, 깨끗히도 치워놨네."
무언가 불만에 가득찬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 어둠의 정적으로 깨뜨렸다. 달의 조명이 아래를 향하자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래를 향한 단정한 보라색 머리카락과 그와 같은 색의 보라색 눈동자가 어둠과 잘 어울리는 창백한 얼굴의 소녀였다. 입고있는 로브는 본래 하얀색인데도 밤이 만들어내는 그림자 때문에 회색 처럼 보인다. 눈의 시아를 가리지 않을만큼 가지런히 잘린 앞머리가 작은 그늘을 만들어내어 소녀의 기분을 한 층 더 강조하는 듯 하다. 소녀가 서있는 장소는 전날에 요괴에게 온목이 찢겨죽은 두 사람이 발견된 곳이다.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 거리며 뭔가를 찾고있다. 주변을 탐색하는 섬뜻한 보라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인다. 보라색의 소녀, 키리아는 자신의 동족이 저질렀을 참혹한 사건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유는 자신에게 건방지게 경고를 한 요괴를 찾기 위해서였다. 마을에 들어오기 전부터 너무도 배가 고팠던 까닭에 마을에서 느껴지는 동족의 기척을 감지할 여유는 없었다. 결국 다른 요괴의 영역에 먼저 발을 들여놓은 것은 키리아였다. 그러나 순순히 나가줄 정도로 소녀의 가죽을 쓴 요괴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모르는 척 며칠동안만 가만히 있었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텐데, 키리아의 존재에 위협을 느끼고서 쓸대없는 행동을 해버린 것이다. 키리아는 건방진 동족에게 누가 우위에 서있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사건 현장은 인간들에게 너무 훼손되어, 뭔가를 찾는 것은 무리로 보인다. 요괴에게 당해버린 희생자들의 시신은 마을의 경비대가 넬이 다녀간 후에 수거했다. 그러나 끝내 지우지 못한 핏자국은 그대로 남아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짐작하게끔 한다. 키리아의 시선이 아래를 향한다. 자신의 발이 보인다. 아무것도 신지않은 상태의 맨발은 그녀의 얼굴처럼 창백하다. 키리아는 그것을 보고서 위화감을 느꼈다. 이것이 자신의 발이 아닌 것 같다. 인간의 모습으로 이렇게 오랫동안 있었던 적이 없었다. 이틀이란 시간동안 키리아는 인간를 앞에 두고서도 죽이지 않았으며, 정체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넬의 얼굴이 떠오르자 키리아는 짜증이 몰려왔다. 하지만 역시나 살의는 생겨나지 않는다.
"꽤 신중한 녀석이네. 그렇게나 나한테 모습을 보이기 싫은거야?"
혹여나 주위에 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역시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키리아는 넬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다른 요괴에게 풀려는 속셈인지, 짜증의 원인을 동족에게 돌렸다. 넬 몰래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은 간단했다. 연약해보이는 소녀가 2층 높이의 여관 창문에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넬은 저녁이 되자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갔다. 키리아는 그 뛰어난 청각으로 옆방에서 들려오는 넬의 심장박동과 숨소리를 듣고서 그가 수면에 빠져들었다고 판단,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창 밖으로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올 때는 주변에 있는 하얀 망토를 집어들었는데, 그것은 혹시나 누군가를 만났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키리아는 '그냥 죽여버리면 그만일텐데', 하고도 생각했지만 낮에 넬이 보여줬던 그 어색한 미소를 다시 보고싶지 않았다. 기왕 인간 놀이를 시작한거 끝까지 인간을 연기해야한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주섭주섭 몸에 그것을 걸쳤다. 키리아는 그래도 역시 알몸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오른손을 들여올려 바라본다. 본래의 자신의 팔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가늘다. 이전에 넬이 말했던 '지킨다.' 라는 말이 다시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에 키리아는 시선을 손에서 때어냈다. 손을 얼굴로 향한다. 손 끝에서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이 느껴진다. 아담한 얼굴 역시 본래의 모습과는 크게 다르다. 키리아는 순간 짓굳은 생각이 떠올랐다.
'인간의 미적기준에서 보면 이 얼굴은 꽤 미인에 속하니까 말야. 만일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이 몸을 넬 녀석에게 보여준다면 어떻게 될까나?'
소녀의 얼굴에 장난스런 미소가 생겨난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눈을 가리고서 밖으로 뛰쳐나가는 넬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키득거리며 눈을 가들게 뜨며, 웃음을 터트린다. 주변에서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자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고서 넬의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는 키리아였다.
'뭐,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둘까? 넬 녀석이 내가 사라진 걸 알아채면 크게 시끄러워질 테니까. 그러고보니 인간 수컷은 모두 똑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녀석이 내가 잠들어있는 방에 몰래 들어오지않을 거란 보장도 없잖아.'
넬이 그럴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키리아는 속으로 그를 비하하고 있었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짜증을 내고 있었다는 것이 의심스러운 모습이다. 아무런 단서가 없었지만, 키리아는 즐거운 기분으로 등을 돌렸다. 그러나 걸어가진 않고, 느닷없이 위를 바라본다. 벽을 가로지르고 높이 솓아있는 옆 건물의 지붕이 보인다. 키리아는 그것을 보고서 '키득.' 하고 작게 웃는다. 순간 보라색의 소녀는 도약했다. 깃털과 같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아무 소리도 내지않고서 재빠르게 지붕 위로 올라섰다. 다리의 근육을 순간적으로 변화시켜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키리아는 집 아래에 잠들어있는 가족이 눈치채기도 전에 다시 뛰어올랐다. 앞에 지어진 목조 건물의 지붕을 살짝 밞고서, 빠르게 움직인다. 바람을 가르며, 하늘로 날아오른다. 보라색의 머리카락이 타오르듯이 휘날린다. 달빛에 반사된 자색의 눈동자가 반짝인다. 지붕과 지붕 사이를 가로지르며, 키리아는 날아오르듯 이동했다. 허공에서 질주하는 보라색 소녀의 모습은 밤을 무대로 화려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모두가 잠든 밤, 소녀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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