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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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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7.10.27 17:34:10 조회: 916 추천: 0 |
[12]
"오늘은 날씨가 좋더군요."
그게 오늘 넬이 가장 먼저 한 대사였다. 기상변화에 대한 시시한 이야기로 넬이 말을 걸어왔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하늘이 맑다느니 바람이 시원하다느니 하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이 녀석을 중요한 말을 꺼내기 전에 너무 둘러대는 경향이 있다. 무엇 무엇을 하려고 하는데, 어떻겠습니까-하고 바로 물어오면 될 것을. 소심한 성격을 가진 것도 아니면서, 서론이 너무 길다. 붙임성이 좋은 탓인지 아니면 단지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어느 정도 들어보니 대충 뭘 말하려는 것인지가 파악된다. 녀석은 지금 나와 함께 밖으로 나가자고 권하려는 것이다. 조촐하게 바구니에 점심 따위를 담아 소풍이라도 가고싶은거냐? 아아, 넬의 해맑은 얼굴을 보니 내가 싫다고 해도 억지로 끌고나갈 것 같다.
"방 안에만 있으면 건강에 나쁩니다."
이것저것 중얼거리다 이제서야 본론을 말한다. 건강이고 자시고, 지금 나는 소화 중이라 몸이 나른하다. 움직이는데에 제약이 생긴다거나 하는 그런 문제는 없지만, 귀찮다는게 솔직한 심정일까? 밤새 밖을 돌아다닌 것에 대한 수면 부족따위는 아니다. 나에겐 체력을 축적할 수 있는 에너지의 공급은 잠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이라도 얼마든지 있다. 수면이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저 딱히 할 일도 없었던데다, 놈에 대한 단서도 없고해서 눈을 감고서 인간들이 침대라 부르는 가구에 몸을 올려두고 있을 뿐었다. 다큰 처자가 이불 위에서 뒹굴거리는 걸 좋지않게 생각했는지, 넬은 쓸대없이 참견한다. 이보셔, 나는 충격에서 해어나오지 못한 연약한 소녀라구. 억지로 끌어내진 않겠지?
"전 괜찮아요."
노골적으로 귀찮다고 말해주곤 싶었지만 관두었다. 일단은 은인이라는 설정이니까.
"그렇다고 계속 침대에 누워계실 겁니까?"
순간 '예.'하고 말해버릴 뻔했다. 그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건 아니지만..."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아마 이렇게 대답하겠지. 포유류는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하지않으면 운동 부족으로 몸에 이상이 생긴다고 한다. 어디에서 들었는지는 몰라도 아마 확실할 것이다. 이 세계의 생물들은 몸을 지탱하는 골격만큼이나 근섬유가 꽤 발달되어 있으니까. 우리의 경우와는 다르게, 최소한이나마 움직여주지 않으면 신체가 약해지는가보네. 움직이지 않고서 가만히 있는 것은 쓸대없는데에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고 회복에 신체가 집중한다는 의미가 아닌건가? 내가 별로 상관없는 것을 생각하는 사이 넬이 입을 열었다.
"안됩니다. 조금이라도 햇빛을 봐야해요."
이 녀석은 '착각 대마왕'인 동시에 '고집쟁이' 였네. 자연스럽게 넬에 대한 타이틀을 하나 더 늘어났다. 나는 그 제일 앞에 '바보.'라는 접두사가 붙어야 한다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싫어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빛을 내는 불덩어리 따위 별로 보고싶지도 않고, 어둠이 더 익숙한 내가 뭐하러 밝은 장소로 이동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당분간은 식량 걱정이 없을 만큼 집어삼킨 덕분에 몸도 무겁고, 요 며칠간 넬 녀석의 특이한 행동에 정신도 지쳐버렸다.
"하아, 키리아양 얼굴이 왜 그렇게 창백한지 이제야 알겠네요. 그렇게 외출을 싫어하니 하얗게 질려버린 거잖아요!"
넬은 한숨을 쉬며, 나에게 호통했다. 아니, 이건 태양광을 보지 않아서 생긴 그런게 아닌데. 혈액순환의 문제라기 보다도, 이 얼굴은 내 진짜 얼굴이 아니니까. 그저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라 말이지. 그런 사실을 모르는 넬은 아무래도 내 피부의 색소가 지나치게 하얀것이 햇빛을 쬐지 않아서이기 때문이라고 결론 지은 것 같다.
"그래도 싫어요."
나는 내 기분을 명확하게 표현했다. 정말로 나가기가 싫은데 말이다. 넬은 내가 그렇게 말해버리자 입을 다물어 버렸다. 후후, 결국 포기해버린 거구나. 나는 원인모를 승리감을 느끼며, 속으로 '아자.' 따위의 감탄사를 내밷었다.
"...."
이상한 침묵이 주위를 맴돈다. 넬의 심박수가 이상하리만큼 차분해진다. 주변의 공기가 차갑게 느껴지는 것은 나의 착각인가? 살며시 넬을 올려다 보았다. 미소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본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는 미소다. 살며시 눈썹 사이에 묘한 주름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않고서 아래를 내려다 보며 미소짓는 넬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에...?"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흉흉한 기운을 뿜어내는 저 견습사제의 얼굴이 묘한 공포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생물인 내가 저런 영장류 따위에게 두려움을 느끼다니. 스스로도 용납이 안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늘진 미소를 짓고있는 넬은 정말로 무서웠다.
"나갈거죠?"
미묘하게 미간에 주름이 하나 더 늘어났다. 어, 어이... 연약한 소녀를 괴롭힐 생각은 아니겠지? 넌 신을 모시는 교단의 사제-견습이라는 부분은 떼어내고서-잖아?
"..."
나는 침묵으로서 답했다. 설마 넬이 나에게 무슨 해코지를 하겠는가? 겉보기에도 순해빠진 저 덜떨어진 바보 사제가 나같이 예쁘장한 소녀, 그것도 요괴에게 기억을 잃은 불쌍한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할 리가 없잖아. 나는 약간 불안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갈...거죠?"
넬의 고개 각도가 살짝 옆으로 기울어지듯 움직였다. 덕분에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림자의 그늘이 그 영역을 확장했다. 넬의 생글거리는 미소가 그렇게 두렵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어느새 넬에게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예에..."
...대답해버렸다. 넬이 나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왠지모를 불안감이 나를 위협했다.
"아아, 정말 다행이군요."
분위기가 급변했다. 순식간에 그늘진 얼굴이 밝아졌다. 같은 미소가 이렇게 다를 수가 있다니. 나는 무의식 중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아, 어쨋든 나는 넬의 요청을 수락했다. 이렇게까지 나에게 간청하는데 외면하는 것은 너무한 일이겠지. 어디까지나 녀석이 불쌍해서 승락해준 것이다. 인간 따위에게 압도당해서 허락한 것이 아니다. 암, 절대로 아니고말고.
"아무래도 그 차림으로 나가는 건 약간 무리겠군요. 주인 아주머니에게 옷을 빌릴 수 있을 겁니다."
양손을 합장하며, 기쁜 듯이 말한다. 아니, 인형 취급까지 할 셈이냐. 난 이 정도도 충분하다고. 보통의 인간 암컷들이 입는 옷 따위 거추장스럽고 불편하단 말이다!
"싫..."
"설마 제 옷을 계속 고집하실 생각은 아니겠죠?"
넬이 나의 의사표현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보니 지금 내가 입고있는 하얀색 망토는 교단의 표시가 그려진 녀석의 옷이었다. 넬 녀석과 같이 있다보니, 의류에서 느껴지는 채취를 신경쓰지 못했다. 갑자기 거부감이 몰려든다.
"...좋은 옷으로 부탁드려요."
사실 여태까지 누군가가 입던 것을 빼앗아왔던 터라 어느 천조각을 걸치든지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도 왠지 넬 녀석이 사용하던 것을 내가 입고있다고 생각하니 갑작스래 싫은 느낌이 생긴다. 싫다기보다도 뭐랄까, 수치심과는 약간 다른 느낌. 나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그게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요즘들어 나는 너무 두뇌를 혹사시키고 있다.
"아하하, 키리아양은 뭘 입으셔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어리버리해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작업용 멘트도 할 줄아는구나. 아니, 이 녀석의 경우라면 그런 시시콜콜한 의미없이 솔직하게 말 한걸지도. 그게 예의상의 의미가 아니라 넬의 솔직한 생각이라고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아아, 정말 복잡한 심정이다.
"그럼 저는 아주머니께 부탁드리러..."
자기가 내밷은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참 빨리도 눈치채는 구나. 넬은 머리를 글쩍이며 방에서 나가버렸다. 주제에 수컷이라고 이성 앞에서 쑥쓰러워하는 건가? 뭐 상관없지. 오래간만에 태양 아래에서 움직일 일이 생겼다. 뭘 입든지 별로 의미없다. 하지만, 넬이 무슨 옷을 골라올지가 약간, 아주 약간 기대되기도 한다. 덧붙여 녀석의 미적 감각이 정상이어야 할텐데하고, 불안만 마음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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