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트메어
|
날짜: 2007.10.25 12:05:15 조회: 771 추천: 0 |
[8]
키리아양의 상태는 겉보기엔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 필요한 대답만을 들려주는 그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타인과의 접촉을 망설이고 있는지, 단 한번도 남에게 먼저 말을 걸지않았다. 가끔 보여주는 어색한 미소는 오히려 자신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거절의 의사를 나타내는 것 같다. 하긴, 그런 끔찍한 일을 겪었으니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억지로 밝은 척하며 다른 사람의 호의를 거부하는 키리아양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프다.
"...?"
내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멍하니 그 아이를 바라보고 있자, 내 시선을 느끼고서 내 얼굴을 쳐다본다.
"어, 어디 불편한데는 없으신가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머뭇거리며, 허겁지겁 생각나는 것을 소녀에게 물었다. 키리아양은 침대 위에 누워선 내가 건내준 책을 넘기며,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다.
"아뇨, 괜찮아요."
방금전까지 무표정이었던 얼굴이 순간적으로 미소를 띈다. 묘하게 어색하게 느껴진다. 어디를 보아도 예쁜 웃음이지만, 뭔가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마치 정해진 행동을 되풀이하는 동물처럼,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는 금새 원래의 무표정으로 되돌아간다. 소녀의 표정으로는 책의 내용에 마음을 빼앗긴 것인지, 아니면 별로 할 일이 없어서 읽고있는 것인지를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내가 시장에서 사왔던 사과가 담긴 바구니가 보인다. 맨 위에 올려둔 과일이 두개 모자른 것을 보아, 키리아양이 먹었을 것이다. 그나마 뭔가를 먹었으니 다행이다. 나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사과를 먹고나서 남은 부분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씨가 들어있는 부분도 그냥 먹어치웠다는 것일까? 내 눈앞의 소녀는 아무래도 그렇게까지 배가 고파보이지는 않았다. 차라리 남은 사과의 과육을 먹는 것이 나을텐데 무엇하러 맛없는 부분까지 먹었을까? 저 아리따운 소녀가 그럴리가 없다. 분명히 먹고나서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겼거나-어릴 적에 이런 장난을 많이 쳤었다.- 알아서 버렸을 것이다.
"그 책, 읽은만 한가요?"
나는 이 어색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책에 대해 키리아양에게 물었다. 그녀가 읽고있는 책은 유명한 방랑시인들이 쓴 '사랑의 노래'라는 소녀에게 어울리는 시집이었다. 나도 몇번씩이나 읽고서 그 일부를 외우고 있을 만큼 감명깊은 책이었다.
"예에, 재미있네요."
재미...있다니. 이 책을 읽고있는 사람에게 재미있다는 반응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내용의 대부분이 슬프고, 이별과 사랑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책을 읽고나선 가슴아프다라는 반응이 돌아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 그, 그런가요? 어느 부분이...?"
나는 소녀가 아무렇게나 페이지를 넘기면서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내가 질문하자 책을 앞으로 넘기며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 '그녀를 만나고 싶지만, 어디까지나 꿈에서야 가능하다.'라는 부분이요. 아마 신분의 차이로 그런 표현을 하는 것 같은데, 생각하는게 너무 유치해서 우습네요. 결국 자기가 못났으니 포기한다는 소리잖아요?"
"아아, 그렇군요..."
"그리고 이 아래 부분말이죠. 여기는..."
글을 쓴 시인을 비웃는 듯한 태도로 소녀는 그것이 어째서 재미있는지를 설명해간다. 소녀의 성격은 그것으로 확실하게 파악이 된다. 자신에게 없는 것이나, 가지고 싶은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지려고 하는 사람.
"아닙니다."
나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나가던 소녀의 말을 멈추었다. 이 아이는 고뇌하는 사람의 고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어째서요?"
보라색의 소녀는 나에게 되묻는다. 정말 모르는 것일까? 키리아양은 확실한 정답을 말했는데, 선생에게 틀렸다는 소리를 들은 학생의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있다. 그것은 순수하게 자신이 착각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좋아하지만 자신이 거기에 다가가도 사랑하는 이가 불행해진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니까요."
소녀는 침묵했다. 내가 말하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려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 같다. 소녀는 몇초간 아무말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모르겠네요.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과 남이 불행해지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죠?"
정말이다. 단순히 나를 놀리려는 목적이 아니라, 정말 모르는 것이다. 남에게 어떤 피해를 주던지 자신만이 행복하면 된다는 단순하지만 잔인한 사상.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억상실 때문에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 이전부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소녀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단지 이름뿐이었다.
"당신에게는... 소중한 사람이 없나요?"
나는 소녀를 의심하게 되었다. 정말 이 아이는 기억상실인 것일까? 나는 소중한 사람의 존재에 대하여 소녀에게 질문한다. 어떤 반응을 들려줄까? 사실 이런 것을 물어버린 것은 경솔한 행동이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이런 것을 묻는 것은 잔인한 짓이었다. 그러나 이미 내밷어버린 말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소중한 사람?"
그러나, 나의 이 걱정은 덧없는 것이었다. 소녀의 표정은 아무런 동요가 없다. 마치 인형을 상대로 대화하는 것 처럼, 무감정한 목석인형같다. 과거에 자신에게 있을지 모르는 사랑하는 이가, 소중한 사람의 존재를 물어도 소녀의 얼굴에선 슬픈 기색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내 질문을 되풀이했다. 나는 순간 소녀의 정체에 대해서 무서운 상상을 해버렸다.
"...키리아양, 당신은..."
인간입니까, 하고 물어버릴 뻔했다. 아니다. 신을 믿는 내가 다른 이를 의심해선 안된다.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생각이다. 나는 머리속에서 맴돌던 의심을 지워버리기 위해서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불안한 사고를 가중시켰다.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 쓴 괴물.'
어디선가 읽은 그 문장이 무서우리만큼 빠르게 내 이성을 사로잡았다.
"네?"
백치와 같은 창백한 얼굴로, 부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다가오는 인간을 죽여서 잡아먹는다.'
갑자기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가 흘러들어왔다. 내 눈앞에 서있는 소녀는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단지 사람인 척을 하고서 보란 듯이 나를 우롱하고 있는 괴물일지도 모른다.
'붉은 마수 키사...'
소녀의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마치 아름다운 자색의 보석을 바라보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공포와 더불어 이상한 신비감이 느껴진다. 희미한 빛을 내며 반짝인다. 눈을 깜박할 때 마다 주위가 흔들리는 것 처럼 느껴진다. 소녀가 나의 대답을 기다리며 침묵하고 있다. 이어지는 조용함이 나의 신경을 곤두세운다. 지금 나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사제님, 큰일 났습니다!"
공포스런 침묵의 순간을 깨어버린 것은 다름아닌 옆방의 투숙객이었다. 아아, 그에게 정말 감사한다. 그러나 이 남자가 이렇게 소란스럽게 내 이름을 외치며 들어온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일것이다.
"무슨 일이죠?"
나는 약간 뒤늦게 반응했다. 순식간에 긴장이 풀어져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작은 소녀가 그 무서운 괴물일리가 없지않은가, 나는 스스로의 멍청함을 반성하며 시선을 남자에게 맞추었다.
"요괴가, 키사가 나타났습니다!"
나는 남자가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들었음에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키사? 요괴가 나타나? 나는 필사적으로 이 단어들의 연관성을 끼워맞추고 나에서 말할 수 있었다.
"맙소사..."
"두 사람이나 당했습니다!"
하루 사이 다섯명이나 집어삼키고도 다시 일을 벌이다니. 그러나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열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반나절만에 잡아먹은 요괴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것은 충분히 놀랄만한 일이었다.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좀 처럼 좋아하지 않는 요괴란 족속들이 대낮에 인간을 습격하다니 말이다.
"이럴수가... 어째서 그런 짓을..."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요괴가 인간을 먹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잘 알고있었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부력감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침대 위에서 별다른 감흥없이 남자와 나를 바라보고 있는 소녀를 쳐다보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거지, 이 아이는 요괴에게 당한 피해자다. 낮부터 이 소녀와는 같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 아이는 요괴따위가 아니다. 그 증거로 지금 일어난 일을 설명할 수 있지. 절대로 아닐거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