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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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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6.08.16 12:42:15 조회: 594 추천: 0 |
개학이 코앞이라 에너지가 떨어집니다....
새하얀 와이셔츠의 가슴 언저리에서 끝단까지, 치약이 흘러내린다. 그와 동시에 중력을
무시하고 5층의 창가에 서있던 소녀는 그대로 창문을 밀고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너, 무슨 생각으로!”
드물게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는 샤오링을 보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소녀는 그대로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의 내용물을 홀짝인다.
“선전포고… 일까요? 역시 갑작스레 칼부림을 하거나 하는 것은 좋지 못하니까요.”
웃는 얼굴로 입을 여는 소녀와는 달리, 레이는 방금 전과 같이 굳은 상태로 서 있었고, 샤
오링도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있었다.
“대단한 자신감이야. 하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모습은 또 왜 그런데?”
샤오링이 태클을 건 것은 엉뚱하게도 소녀의 모습이었다. 묘하게 마리나와 비슷한 체형을
하고 있는 소녀의 얼굴은, 마치 샤오링을 그대로 축소해 놓은 듯한 모양이었다. 어깨에서
살랑거리는 백은과도 같은 머리카락과 마찬가지의 눈썹. 검게 빛나는 눈동자. 자매는커녕
체형만 같다면 쌍둥이라고 해도 문제가 없어 보였다.
“후훗, 신경 쓰이나요? 어차피 믿을 건 가슴밖에 없는 여자의 매력 따윈 없는 거나 마찬
가지죠. 어때요 당신? 나한테 오는 건?”
그러고는 시선을 레이에게로 돌린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소녀를 비추고 있지 않고, 마치
심연의 어둠속에 빠져버린 것처럼 그 빛을 잃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담았다.
“굉장히 좋은 남자로 보이는데, 무뚝뚝한 건 마이너스일까? 뭐, 그래도 내 취향이니까
상관없겠죠.”
그런 그녀를 무시하듯이, 샤오링은 흉흉한 빛을 발하는 태도(太刀)를 들고 입을 연다.
“선전포고도 해 주셨으니 그럼 여기서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
그러자 고개를 양 옆으로 저으며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건 나중의 즐거움으로 남겨 두죠. 오늘 밤은 역시 달빛이 좋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소녀는 들고 있던 술병을 놓고, 나타난 순간과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졌다.
압도적인 수준의 요기(妖氣)에 놀라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마리나와 시리아는 그녀가
사라진 순간,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도, 도대체 뭐예요 저건!”
폐를 가득 채우는 산소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마리나의 물음에, 샤오링은 떨어진 칫솔을
주워 묵묵히 욕실로 향할 뿐이었다. 그리고 욕실의 문 앞에서 잠깐 고개를 돌린다.
“마음이 바뀌었다. 이번일, 전력으로 임해주지. 오히려 너희들이 발목이나 잡지 말아줬으면
하니까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지켜.”
그러고는 욕실로 들어간다. 그와 동시에 침묵을 유지하던 레이가 입을 열었다.
“피곤하네요. 슬슬 저도 씻고 자야지 내일부터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고는 움켜쥔 두 주먹을 풀자 고여 있던 피가 손가락을 타고 바닥에 방울져 떨어진다.
그것이 마음에 걸린 마리나는 대충 붕대와 소독약을 가지고 와서 레이의 앞에 앉았다.
“앉아요! 곪으면 여러 가지로 곤란하니까.”
자기답지 않은 친절을 발휘한다며 혼자 툴툴대는 그녀의 모습에 살짝 미소를 지은 레이는
털벅, 하고 마리나의 앞에 앉아서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손톱이 파고들어 껍질이 벗겨지는
손바닥에 소독약을 대충 부어대고 자신의 특제 연고를 친히 발라주는 마리나를 보며 시리아
는 ‘세상도 변하지만 언니도 변했구나….’ 라며 샤오링을 따라 욕실로 향했다.
“다됐어요. 그리고 실례지만 방금 전 그 여자의 대해서 물어도 괜찮나요? 당신과는 적잖은
관련이 있던 걸로 보이는데.”
어울리지 않는 조심스런 태도를 취하는 마리나를 보며, 레이는 웃는 얼굴로 시원하게 그 답
을 해주었다.
“가족의 원수, 정도일까요? 사실 저보다야 스승님 쪽이 관련이 훨씬 깊으니까요.”
무덤덤하게 이야기하는 청년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어딘가가 부서져버린 그의 웃음에 소름
이 돋은 마리나는 얼굴을 휙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시리아와 마찬가지로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혼자 남은 레이는 지워지지 않을 미소를 지우며 붉은 달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아름답군. 당장에라도 피를 쏟아버릴 것처럼.”
“그래. 달은 언제나 아름답지. 절대로 닿을 리 없는 존재이니까.”
뒤에서 나지막이 울리는 샤오링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로 돌아선 레이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 들으셨어요?”
“혼자서 중얼거리지 말고 몸을 쉬어둬라. 내일부터는 좀 험하게 움직일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욕실 쪽으로 돌아선 샤오링의 얼굴에는 연민과 후회가 가득 담긴 표정이 떠
올랐다.
‘그로부터 15년인가… 저 아이도 인수라(人修羅)의 길을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자신의 제자를 서글프게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어딘가 불안했는지, 멋쩍게 이쪽을 향해
웃음 짓는 레이. 그는 여자들이 점령한 욕실에는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싱크대에서 양치를
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샤오링의 옆에 마리나가 다가왔다,
“그 정체불명의 여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해줄 겁니까?”
“모르는 편이 좋아. 알고 나면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어질 테니까.”
그런 말을 남기고 샤오링은 욕실을 나와서 당당히 침대위에 쓰러졌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
와 이불을 덮어준 레이는 그대로 기숙사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 그를 향해 눈을 반쯤
감고서 샤오링은 작별의 인사를 입에 담았다.
“잘 자라.”
“후훗, 그거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스승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마지막으로 뒤로 돌아 미소를 남긴 청년은, 그대로 어둠속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잠시 후, 뒤늦게 욕실에서 나온 마리나는 자신의 침대에 뻗어 있는 샤오링을 보고 침대의
소유권을 가지고 대결했지만, 결국은 바닥에 누워 패배를 곱씹으며 잤다고 한다.
아침. 밤을 뒤덮는 붉은 달은 그 모습을 감추고 태양이 떠오른다. 아직 새벽의 찬이슬이
사라지지 않을 시간, 기숙사의 주방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침부터 식욕을
자극하는 구수한 빵의 냄새에 제일 먼저 눈을 뜬 것은 샤오링이었다.
“아, 일어나셨어요?”
어제의 우울한 모습은 이미 사라진 청년은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컵에 가득 따라 아직
잠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스승에게 넘겨주었다.
“아… 침대가 딱딱해서 그런지 허리가 아파. 지금 몇 시야?”
꿀꺽꿀꺽, 하고 우유를 마시는 샤오링의 입술을 타고 우유가 흘러내린다. 어제는 치약으로
더럽혀진 와이셔츠가 이번에는 우유까지 묻는다. 한번에 원 샷 해버린 컵을 내려놓고 옷을
벗는 그녀에게 청년은 새 옷을 가져다준다.
“7시가 조금 넘었어요. 다른 두 분도 깨워서 일단 밥이라도 먹죠?”
청년의 시선에 끝내는 대자로 누워있는 마리나와 그 옆에서 조용한 숨소리를 내는 시리아가
있었다. 요조숙녀와 같던 마리나의 이미지가 점점 부서지는 것을 느끼며 레이는 그녀를 깨
우기 위해 다가갔다.
“슬슬 일어나세요. 아침밥 먹어야죠.”
먼저 타깃으로 삼은 것은 마리나였지만 아무리 어깨를 흔들고 말을 걸어도 그녀는 일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시리아의 어깨에 손을 가져가자, 그녀는 그 즉시
번쩍 눈을 떴다. 그러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가볍게 풀더니 마리나의 뺨에 양 손을
가져갔다.
“언니, 일어나세요. 아침입니다.”
찰싹, 하고 몇 번 뺨을 때리자 일어나는 마리나. 아침을 힘들어하는 그녀에게 있어서 이
시간은 지옥과도 같은 것이었다.
“5…5분만~.”
잠에 취해서 제대로 혀가 돌아가지 않는지 어딘가 바람이 새는 듯한 발음으로 애원하는 것
과 동시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다. 그런 그녀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샤오링은
자신의 긴 다리를 마리나의 등 쪽으로 집어넣어, 그대로 차 올렸다.
빙그르르, 약 3회전정도 옆으로 굴러간 마리나는 그대로 침대의 다리에 머리를 박고 일어섰
다.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샤오링에게 달려드는 그녀를 바라보며 무심코 웃는 시리아와 레
이. 서로 얼굴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는 레이와는 달리 고개를 돌려버리는 시리아. 하지만
입술에 머금은 웃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쯤 해두시고 일단 앉으세요. 기껏 해놓은 요리가 운다고요.”
사실 일방적으로 마리나가 당하고 있었지만 일단은 중재를 하고 그녀들을 식탁으로 이동시
키는 레이. 식탁 위에는 사람 수 만큼의 그릇 위에 잘 구워진 식빵과 양배추 샐러드. 그리
고 반숙계란이 올라와 있었다.
“헤에~ 당신 양식도 빠삭하네요? 어제 저녁도 그렇고, 혹시 전에 요리라도 배웠나요?”
자신의 커피 잔에 설탕을 넣으며 묻는 마리나의 그릇에 잘 부쳐진 계란을 올려주며 레이가
대답한다.
“이거요? 취미삼아 하고 있는 거죠. 양식이야 최근 들어서 요리책을 보고 시작한거고요.”
“취미 취고는 상당한 수준인데요? 저기 놀고 있는 여자와는 완전 딴판이네요.”
단란했던 식탁의 공기가 일순간 식어버렸다. 아침의 원한이 아직 남아있던 걸까. 찌릿찌릿
한 시선을 샤오링에게 향하는 마리나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레이. 하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 몫의 식빵을 이미 다 먹고 프라이팬에 남아있는 식빵을 가지러 일어난 상태였다.
“거 참. 생긴 건 당장에라도 들고 가고 싶을 정도로 귀엽게 생겼는데, 성격은 왜 그래?
정 그렇게 불만이면 다음 식사는 특별히 내가 대접해주지. 감사하라고.”
그러고는 아직 뜨거운 식빵을 유유히 입에 물고 자리로 돌아온다. 그런 그녀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마리나를 무시하고 식사를 끝낸 샤오링은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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