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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6.08.18 00:06:10 조회: 528 추천: 0 |
늦은 밤. 일반적인 생물체들이라면 숙면을 취해야만한 시간, 그러나 난 몸 안에서 뱀파이어 특유의 활력이 샘솟는것을 느끼고 관 뚜껑을 열었다.
삐그덕.
듣기 싫은 소리. 관을 주문 했을땐 목수가 최소 천년은 갈꺼라면서 최고급 오크나무로 관을 짯다고 호언장담 했지만, 왠지 못 미더웠다. 천년은 커녕 4백년밖에 안됐는데도 이 모양이니....... 어서 관을 갈던지 해야겠다. 아니 그럴필요도 없겠군. 이제 엘프들이 사는 섬에 도착하면 관에 들어갈 일도 없을 거다. 뱀파이어에게 관은 세월을 피해 숨는 영지에 불과하다.
많은 무지한 중생들이 뱀파이어들은 모두 낮에 관속에 고이 누워 있다가 모두가 잘 시간에 박쥐로 변신해서 피를 빨아먹는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게 전부 사실인건 아니다. 물론 박쥐로 변신하는건 사실이지만 관속에 누워 있는건 마법의 힘을 빌려 봉인 되채 누군가에 의해 관뚜겅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으로 절실하게 그런 일이 필요할 때 이외엔 침대나 바닥에서 잠을 청한다. 예를 들자면 곰의 동면이랑 비슷하다고 할까? 그러나 몸의 기능을 멈추고 관속에서 몇 백 년이고 잠을 자는 건, 뱀파이어가 아니면, 뱀파이어들의 마법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뱀파이어들을 따라한답시키고 인간이나 오크, 엘프들이 그런 짓을 한다면, 혈액순환장애부터 시작해 심근경색에 이르는 무시무시한 질환들을 안은 채 최후를 맞이할 꺼다.
관 윗부분을 잡고 일어서자 대리석 바닥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오크상인이라던지, 마족 귀족에게 나를 넘긴건 아닐까?(정확히 말하면 내 관과 썩지 않은 몸뚱이지만) 그렇담 말이 더 잘 통하겠군. 아무리 4백년이 지났다지만, 나는 위대한 로메니아의 군주 데몽드2세니 문전박대하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곳을 다스리는 지도자를 만나 내가 누군지 밝힌다면 로메니아를 다시 나에게 넘기겠지. 암 그렇고 말고.
뱀파이어들의 눈은 밤에 더 잘볼 수 있다. 대리석바닥 말고도 고급스런 커튼이 쳐있는 창문과 수많은 먼지 쌓인 책들을 보며, 난 이 집의 주인이 엄청난 부호거나 귀족일거라 확신했다. 그러나 거기까지며 좋았겠지만 난 책 말고도 수많은 골동품들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문 앞에 선채 은색으로 빛나는 긴 것을 들고 있는 엘프들을 보자 방금 전 했던 확신을 잃었다.
갈색의 가죽과 은색으로 빛나는 저것. 난 특유의 군사적 천재성으로 저게 4백년이 지나는 동안 새로 발명된 무기란걸 알 수 있었다.(무기가 아니라면 경비병이 칼대신 저렇게 조잡한걸 들고있을리 없지 않는가?) 빛깔부터 은색으로 도배됐는데 혹시 저게 은을 발사하는 장치가 아닐까?
은은 뱀파이어에게 치명적이다. 물론 그보다 더 치명적인 오르하리콘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 오르하리콘을 본적은 없기에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건 은이다. 은은 뱀파이어나 언데드들에게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다. 몸에 닿기만 해도 불꽃처럼 스며들어 온몸을 불태운다. 그리고 그것이 목을 부드럽게 쓸어주기만 해도, 피가 분수대처럼 뿜어져 나옴과 동시에 뎅겅 소리를 내며 잘려버린다. 이쯤 되면 충분히 공포스럽지 않은가?
나는 엘프들을 신용하지 않는다. 양털이나 깎고 숲에서 일생을 보내는 미천한 엘프들은 나같이 고귀한 뱀파이어도 못 알아보고 험악한 은제무기를 남발할 가능성이 높다. 뱀파이어가 불사신이라지만 그건 심장이 정상적으로 움직일때 가능한 일이다. 미천하고 신용할 수 없는 엘프들 대신 나는 나의 백성들을 만나기 위해 박쥐로 변신해 창문을 빠져나갔다. 오랜만에 사용하는 변신마법이지만, 정확하게 캐스팅되었다. 흡족한 마음이 들은 나는 날갯짓을 서둘렀다.
“전하. 고귀하신 분. 수 백 년이 지나도 전하의 업적은 모두가 기억할겁니다.”
충성스러운 기사 포아나 경이 관뚜겅을 닫기직전 나에게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내가 그의 인사에 대해 답할 수 있는거라곤 미소밖에 없었다. 이별을 위한 마지막 의식이 끝나자 뚜껑이 닫혔다. 그리고 끝도없는 어둠이 몰려왔다.
4백년 전 내가 세상과 이별할 때 나는 적어도 불행하다거나 쓸쓸하지 않았다. 황제로부터 데몽드(악마)라는 칭호를 받으며 기사단을 이끌었을 때부터 함께한 포아나 경이 나의 마지막 순간도 함께 해줬기 때문이다. 난 기억을 더듬어(워낙 생생한 나머지 더듬을 필요도 없었다.) 포아나 경의 집을 생각해 내는데 성공했다.
달빛을 받으며 하늘 높게 날갯짓을 하자 나의 브램성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리고 로메니아의 민가들도 보였다. 빨간 지붕에 하얀 벽들들로 지어진 저 집들. 4백년동안 그다지 변한게 없단 느낌이 들기도 하다. 저 집들 중에 포아나경이 사는 집이 있을것이다. 그도 뱀파이어라면 4백년 세월의 풍파 따위는 그냥 이겨냈을 것이다.
4백년간 얼마나 변했을까? 사는게 너무 지루해져. 권태에 쩔어 사는 드래곤처럼 변했을까? 얘기할 이야깃거리는 얼마나 많을까? 일년동안 얘기해도 4백년동안 있었던 얘기를 다 못할만큼 많았지 않을까? 자식은 또 얼마나 많을까? 기대감과 함께 설레이는 감정이 몰려왔다.
허름하지도, 그렇다고 사치스럽지도 않은 하얀 벽돌로 된 집. 사냥을 마치고 자주 놀러가 커피 한잔씩 마시곤 했던 그 집, 4백년동안 변한것 하나 없어 보이는 그집, 난 망또에서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이상하게도 늦은 밤이지만 전혀 실례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도 나만큼이나 우리의 상봉을 기뻐할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문을 두들긴지 한참 뒤 약간 통통하게 생긴 여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누구시죠?”
포아나경의 자손인걸까? 문을 두들긴채 한참 지났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아 다급한 마음이 들었었지만, 그래도 집에서 사람이 나오자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폐가는 아닌것이었다. 만약 포아나경 일가가 이 곳을 떠낫더라도 주소를 찾을 수 있다.
“나는 로메니아 데몽........”
“혹시 블러드 백작님이신가요?
블러드....... 마왕보다 더 심한 나의 잔인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마족들이 부른 이름이다. 엘브로즈의 신성제국 황제에 의해 백작으로 봉해졌던 나는 전투에서 패배한 켄타로우스 포로나 마족 포로들을 말뚝에 박아놓고 그 앞에서 고기의 살점을 뜯었다. 뱀파이어들에게 피는 생명의 원천이기에 가능한 일이였지만, 나 또한 속으론 문명인으로서 비위가 여간 상한게 아니였다. 그러나 뱀파이어들의 위대함과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잔인성을 통해 공포를 안겨줘야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마족들과 켄타로우스들, 그리고 우리들 위에서 왕국을 이루던 고블린들은 나를 ‘말뚝왕 데몽드‘라는 칭호나 '피’란 뜻의 엘프어 블러드를 사용해 ‘피의 백작 블러드’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왜 내 고귀한 이름 대신 야만스러운 호칭을 사용하는거지? 블러드백작이라고 부른걸 보면 날 아는거 같긴 한데.......
“지금 포아나경이 안에 있소?”
“일단 들어오세요.”
난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올거란걸 알고 있었다면, 적어도 마왕의 첩자는 아닐것 아닌가?
안으로 들어가자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우리가 머물던 둥그런 원목 탁자대신 싸구려 나무 의자에 싸구려 나무 탁자. 그리고 잡스러워 보이는 옷들....... 가세가 기운건가? 4백년간 포아나 경이 무척이나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자 왠지 모르게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찌 이 집에서 죽음의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어째서지? 난 일단 모든 의문을 감추고 여자가 안내하는 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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