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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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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6.08.13 12:38:28 조회: 581 추천: 0 |
여인의 피 흘리는 손가락이 벽건을 가르킨다.
여인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떨어진다.
피탄(披呑)! 피탄! 피탄! 피탄!
사장없이 육체를 부수고 심장과 뇌수를 삼켜버릴 가공할 마어(魔語).
눈이 사르르 감긴다.
"너…."
순간 건은 못내 동생들이 떠올랐다.
"구경했으니…."
왜 더 해주지 못했나 하는 후회가 온 몸을 잠식했다.
더 많이, 더 많이, 좀 더, 좀 더 해줬으면 하는 소망과 후회의 교차에서 벽건의 마음은 죄어왔다.
마음의 고통에 여인의 뒷말이 조금이라도 빨리 나오길 바랐다.
'죽어라' 라는 단순한 종말의 선언.
"밥 좀 줄래? 나 지금 무지 배고프거든."
순간 벽건은 귀를 의심했다. 그렇게 나쁜 귀는 아니었다. 오히려 잘 들리면 잘 들렸지 잘못 듣는 다거나 환청이 들리진 않았다. 그렇게 심기가 약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잘못들을 건덕지가 없었다.
슬며시 눈을 뜬 벽건은 물어보고 싶었으나 몸이 굳어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하루종일 뛰어다녀서 힘도 없고, 배도 고프고…몰래 구경했으니 밥이라도 줘야 예의가 아니니?"
너무도 당연한 하대는 벽건의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은 그저 잘못 듣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했을 뿐이었다. 혼자만의 생각이었지만 죽다 살아 돌아왔으니 그 감동이 얼마나 크겠는가. 얼른 돌아가 동생들과 같이 웃고 싶었다. 동생들에게 더 잘해주고 싶었다. 벅차오르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사람의 표본이라 할 수 있었다.
"내 말이 안들려?"
여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 아! 네!?"
"밥 좀 달라고."
"네? 무, 물론이죠."
"그럼 앞장 서."
정말 짧은 대화의 오고 감으로써 상황은 종료, 벽건은 얼떨결에 앞장을 섰다.
사실 많은 것을 물어보고 싶었다. 왜 사람을 죽였냐 부터 시작해서 그녀가 쓰는 힘에 대한 것과 남자와의 관계 등. 하지만 묻고 싶지 않았다. 그걸 묻게 되면 자신은 정말 인간이 아니게 될 것 같다는 직감적 본능이었다.
골목을 빠져나와 집까지는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달렸을 땐 몰랐다. 한 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전력질주로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았다. 이런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한 벽건은 늦었다는 사실만 걱정하고 있었다.
띵동!
초라한 대문. 초라한 집.
여인의 눈은 살짝 찡그려졌다.
[누구신가요?]
"운아! 오빠야."
[뭐하고 왔어, 이 바보! 준이랑 수 잠들었어!]
"미, 미안. 미안해."
동생의 격한 반응에 벽건은 몸이 움츠러 들었다.
[기다려, 나갈께.]
하는 말과 동시에 문이 열리고 대문이 열렸다. 머리를 끈으로 묶고 분홍색 점퍼를 걸친 잠옷 차림. 커다란 눈이 귀여운 소녀, 벽건의 동생 벽운이었다.
커다란 눈을 가진 벽운은 나오자마자 눈이 더 둥그래졌다.
쑥맥에 용기도 별로 없는데다 얼굴만 반반한 오빠가 이런 미인을!?
"운아. 꼭 그걸 입으로 해야겠니?"
"아, 앗!? 또!?"
"하아…생각은 제발 생각에서 그쳐달라고."
"아, 응 미안."
여인은 남매가 벌이는 만담 아닌 만담이 제법 웃겼는지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이쪽은 제 동생인 벽운이에요. 인사드려 이쪽은……음……."
그녀의 이름과 신분 조차 모르는 벽건의 소리는 늘어지는 것이 당연했다.
"내 이름은 서민주. 좀 흔한 이름이지. 그렇지?"
"그렇네요. 후훗. 제 친구들 중에서도 민주란 이름이 네명이나 있어요."
순간 벽건은 동생의 입을 막고 싶었다.
저 여자는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냉혈한이라고!
"나도 그랬지. 너무 흔한 이름이라 아버지보고 바꿔 달랬더니 아버지는 그 이름의 무게와 뜻이 결코 가볍지 않다면서 한사코 반대했었지."
"그래도 정감있는 이름이잖아요?"
"그래? 그거 기분 좋은걸?"
"사실인데요 뭘."
어느새 둘은 친해졌다.
입을 막고 싶다는 생각을 수정하고 소리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저 여자의 이름이 가짜일지도 모르고, 저 이야기도 필히 지어낸 걸 거야! 라는 걸 말이다.
"오빠! 손님을 계속 대문 앞에 두실거야!?"
"아, 아 그렇지 안으로 들어가야지."
"드디어 들어가는 건가? 훗."
대문을 지나 현관으로 들어서자 여인, 서민주는 놀라 듯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 모습을 보지 못한 벽건과 벽운은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작아…."
"네?"
작은 중얼거림이 들렸다.
"집이 상당히 작네."
'대놓고 그런 이야길하다니!'
벽건은 뭐라고 말 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광경을 보았으니 몸을 사릴 수 밖에.
"그렇죠? 그래도 이 집 너무 좋아요."
"호오? 왜 그렇게 생각해?"
"오빠랑 동생들 추억이 여기 묻어있고, 향기가 배어있으니까요."
"그렇구나."
감수성이 뛰어난 벽운의 진심으로 기쁜 듯한 말에 서민주는 눈을 번뜩이며 웃었다.
"오빠. 나 준이랑 수아 좀 깨우고 올께!"
"어, 그래."
벽건과 서민주는 거실에 앉고 벽운은 동생들을 깨우러 방에 들어갔다.
거실엔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벽건은 그저 손에 있는 짐을 풀어 놓고 바닥만 보고 있었고 서민주는 여기저기 둘러보기에 바빴다.
"거실이 되게 좁다?"
"와…이런 작은 TV도 있네?"
작니 좁니 무례하고 예의없는 듯한 감탄사는 왠지 그녀가 서민이 아닐 것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문득 다시든 궁금증. 아까는 왠지 물어보면 안 될 듯 했지만 동생을 만나고 나니 도는 묘한 안도감에 그는 다시 궁금증이 동했다.
"저기…."
"왜?"
"질문이 있는데 뭘어 봐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해."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답만 하는 여인에게 정중히 말을 건 벽건은 직설적으로 물어보았다.
"왜 사람을 죽인거죠?"
잠시 사이의 침묵.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되돌아온 반문.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니.
"분명히 그 창이 심장으로……."
"너에게 있어 '피(blood)'는 무슨 의미지?"
말을 끊고 들어오는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야, 죽음이 아닐까요?"
"어째서?"
"진한 붉은 색이라는 것하며 피는 다치면 흐르잖아요."
"넌 평범한 사람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구나. 그리고 사물의 내면을 읽을 줄 몰라."
무슨 소릴까?
"넌 피가 무슨 역활을 하는지 알아?"
"물론이죠."
피는 심장에서 시작되어 폐를 지나며 산소를 공급받아 온몸, 전신에 산소를 옮기는 역활을 한다.
왠만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지식.
"그렇다면 피가하는 일은 뭐지?"
"간단히 말하면 생명 유지라 할까요?"
"잘 아는군."
"네?"
여전히 아리송했다.
"나에게 있어 피의 상징(symbol)은 '생명'이자 '수호'야."
"그 말은…?"
"피의 창은 사람을 죽이는 병기가 아니란 소리지."
"하지만 분명시 심장을!"
피식 웃은 여인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고 말했다.
"이해를 못하는군. 내가 보낸 창은 단순히 봉쇄(封鎖)와 정지, 은폐(隱閉)의 역활을 할 뿐이야."
"그, 그런!"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다.
그러나 여인의 설명은 설득력이 있었고, 일리(一理)도 있었다.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사람을 죽여본 적 없어. 그리고 죽이고 싶지도 않아."
마지막으로 들려온 고압적인 대답으로 대화는 슬슬 끝을 고하고 있었다.
"내가…내가 보았던 모든 것을…다른 이에게 얘기 하면 어쩔 건가요? 그땐 절 죽일 건가요?"
"아니. 넌 말하지 않아."
"어째서 그걸 알죠?"
"넌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마치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여인의 태도에 벽건은 심통이 났다.
"서로 본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죠?"
"훗…첫인상을 보면 알 수 있고. 사실 감(sense)이라는 거. 없으면 이 세계를 살 수 없어."
뭔가 억지스러웠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말해줄까?"
"뭐죠?"
몸이 경고한다.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입이 절대 가볍지 않아."
순간 벽건의 정신은 아득해졌다. 심박수는 놀라울 정도로 올라가고 온몸의 핏줄이 터질 것 같았다. 팽팽해진 근육, 꽉 진 주먹으로 피가 흘렀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간 것이었다.
멍청이! 멍청이! 멍청이! 멍청이! 멍청이!
그랬다. 처음 본 사람이, 그 것도 비밀을 들킨 사람이 다짜고짜 하는 말이 밥달라니. 상식적으로도, 아니 비상식적으로도 조금 미심쩍은 일이다. 그런데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의 눈동자로 느꼈던 미칠듯한 살기에 반응하여 혼자 패닉에 빠진 자신의 실수인 것이었다.
정말 멍청하게…집으로 대려오다니.
"정말 사람은 안죽였어. 오해는 하지마."
여인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러고 보면 벽건이 봤던 여인은 여유롭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여인의 여유로움은 무서운 살기와 위기감이 숨어있다. 이를 안 벽건이 입을 열려는 찰나!
"와아아! 건이 오빠!"
"형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거실 문이 팍 열리며 동생들이 들어왔다. 뒤따라 들어온 벽운이 소리 질렀다.
"준아! 수야!"
"와아! 이쁜 언니다!"
"진짜 진짜! 이쁜 누나다!"
사정없이 떠들던 동생들을 진정시킨 벽운은 친절히 동생들을 소개시켰다.
"요 녀석이 수아에요. 우리집 셋째죠. 여장부에요. 여장부. 그리고 요 녀석이 준이. 막내에요. 원래 학교에서는 남자라고 의젓하게 있는데 집에선 이렇게 정신이 없어요."
"둘 다 운이 처럼 눈이 크고 귀엽다. 아 동생 삼고 싶어라─"
"후훗. 이 개구장이 좀 제발 대려가세요."
"어머! 정말?"
벽운과 서민주는 즐겁게 대화하며 동생들과 어울렸다. 하지만 그 대화에 벽건은 끼지 못했다. 이마에선 식은 땀이 흘렀다. 그녀를 경계하는 눈은 힘이 들어가 있었다.
"먹자 먹자!"
"치킨에, 빵에, 음료수, 튀김, 떡볶이 까지!"
"이 녀석들아! 손님도 계신데 좀 조용히 해!"
"난 시끌벅적한 게 좋더라."
벽건에게 있어 가시방석보다 더한 시간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집 앞 대문. 배웅한다는 말만 남기고 서민주를 대리고 나왔다.
주체 할 수 없는 분노가 몸을 사로잡으려 했다. 진정이 되지 않았다. 눈 앞의 여자가 동생들에게 무슨 일을 벌일 지 몰랐다. 참을 수 없었다. 참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죽여버리고 싶다!
"내 동생들에게 털끝 하나라도 손대기만 하면!"
"동생들이 귀엽던데."
"헛소린 집어 치워!"
"헛소리가 아니야. 정말 귀엽던데."
여인의 이런 태도가 화를 돋구었다.
"내게는 너무나 소중한 동생이야. 그러니까!"
"알아. 알고 있어. 나에게도 소중한 것이 있지."
"말하지 않아. 그러니까……그러니까!"
"……."
어느새 벽건은 울먹이며 애원조의 태도가 되어 있었다. 그만큼 벽건에게 있어 동생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었다. 죽어도 자신이 죽고, 욕을 들어도 자신이 듣는다. 자신이 못입고 못먹어도 동생들은 꼭 입고 먹어야 한다.
"너에게 하나 충고를 해도 될까?"
"이야기는 하지 않아. 제발!"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니야."
"그, 그럼?"
여인은 벽건을 돌아보았다.
"넌 너 자신의 소중함을 몰라. 네가 동생들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동생들에게 있어 너는 소중한 존재야. 그걸 잊지마."
"뭐?"
그걸 끝으로 서민주라는 여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뭐지? 뭐야!
여인이 남긴 말을 머리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여인에게 가졌던 자신의 인상은 그저 오해일 뿐일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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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 부터 본격적인 이야기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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