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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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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7.10.04 19:41:18 조회: 852 추천: 0 |
[3]
이 세상에서 기적따윌 바라지 않게 된 것은 내가 열두살이 되던 해였다. 나와 종종 놀아주던 과일가게의 헬렌이, 어른이 되면 수도로 올라가서 그림을 그리겠다며 나에게 으름장을 놓던 기가 센 꼬마아이가 하루 밤 사이에 죽어버린 것이다. '키사의 저주'라 불리는 이 기묘한 전염병은 어른 아이를 가리지 않고, 순식간에 마을에 퍼졌다. 옆집의 마가렛 아주머니부터 시작해 잡화점의 로디먼 아저씨까지, 내가 알고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모습으로 죽어갔다. 정확한 원인은 지금도 알 수없지만, 아무래도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 찾아온 상인이 넘겨준 약병 때문이 아닌가한다. 나는 그 당시 마을을 떠나, 다른 지역의 성당에 가있었기 때문에, 헬렌의 죽음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다만, 로디먼 아저씨를 관으로 옮기는 장면은 생생히 기억한다. 시커멓게 변해버린 눈과, 창백한 피부, 그리고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몸.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키사의 저주'에 걸린 사람의 최후였다.
[어머니는 왜 돌아가신 걸까요?]
그 이후로 나는 기적따위를 믿지않게됐다. 헬렌과 마가렛 아주머니, 그리고 로디먼 아저씨 모두 퀴스나트를 믿는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요괴가 내리는 이상한 병에 죽어버리다니. 나는 그렇게 신을 원망했다. 무더운 여름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사제님이 말씀하시길.
[퀴스나트님이 필요해하시기 때문이란다. 그분이 너희 어머니를 천국으로 인도해주실거야.]
[천국은 어디에 있나요?]
[천국은 저 너머에, 그러니까 저 하늘위에 있지.]
[헬렌도 천국에 갔을까요?]
[헬렌은 착한 아이였으니까, 천국에 갔을거야.]
나는 사제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지껏 한순간도 의심해 본적이 없는 천국의 존재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버린 내 동생은 어떻게 되는걸까? 착한 일은 하지않았으니까 천국에 못가는건가, 하고 밤을 새워 울기도했다. 어머니는 동생을 임신한 채로 '키사의 저주'에 걸려버린 것이다.
[천국은 어디에 있나요?]
이번에는 사제님에게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하늘을 향해 물었다. 장례식이 끝난 후,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가 나무 아래에서 드리누어 떠다니는 구름을 바라보며 나는 이 세계의 창조신에게 천국의 위치를 물어보었다. 대답이 들려올리가 없다.
[역시 저 너머에 있는건가요?]
[아니-]
나는 귀를 의심했다. 하늘의 신께서 나에게 직접 대답해 줄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확실하게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 조용한 음색의 그 목소리는 어째서인지 날카로운 느낌을 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보라색의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어떤 누나가 서있었다. 누나는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회색의 망토를 쓰고있었는데, 겉보기에도 통풍이 잘 되지않아보여서 보고있는 내가 더 답답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런 복장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누나의 얼굴은 창백해보였다.
[저 너머에 연결된 건 천국따위가 아니야.]
마치 인형처럼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서 말을 이어나간다.
[그럼 뭐가 있는데요?]
나는 호기심에 물었다. 이 누나는 정말 알고있는 것일까? 저 너머에 있는게 천국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까? 나는 누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을 제촉했다. 누나의 커다란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 순간, 나는 누나의 눈동자가 기묘하게 휘어지는 것을 보았다.
[하늘과 이어진 저 곳에 있는건-]
어째서일까, 나는 그 때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두려움을 느꼈다. 곧이어 누나의 입이 일그러졌다. 뭔가가 즐겁다는 듯이, 키득 거리며 입을 연다.
[앙풰(enfer)-지옥-이야.]
천국이 아니라, 지옥?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누나에게 되묻는다.
[누나는 그걸 어떻게 알죠?]
잠시동안의 침묵이 이어졌다. 시원한 바람이 언덕으로 불어왔다. 누나의 아름다운 보라색의 머리카락이 불꽃이 타오르듯이 휘날린다. 그 때, 누나는 바람과 같이 조용히 그러나 날카롭게 말했다.
[내가 거기서 왔으니까.]
.
.
.
그는 내가 걸치고 있던 천조각 대신 입으라는 의미로, 자신이 입고있던 로브를 나에게 넘겼다. 갈색 머리의 남자가 로브를 벗자, 그 안에는 '퀴스나트'를 섬기는 사제의 복장이 있었다. 하얀색의 수의와 같은 그 옷은 수도자의 망토를 연상시켰으며, 가슴 오른쪽에는 '퀴스나트'의 문장인 림베르노의 십자가가 그려져있다. 남자는 사제였다. 신을 모시는 사제가 뭣하러 그 시간에 골목을 배회하는건지. 뭐 나랑은 상관없나? 짜증스럽게도, 날이 밝아오자 내가 만들어놓은 참상을 구경하러 인간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모조리 죽여버리는 방법도 있지만, 배가 고픈것도 아니니까, 무엇보다 귀찮았기 때문에 그만두기로 했다.
"세상에나... 어떻게 이런 짓을..."
"또 요괴의 소행일까요? 옆마을에서도 스무명이나 당했다더군요."
정확히는 스물두명이다, 멍청아. 인간들이 모여들자 서로 시끄럽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피의 바다가 이리저리 펼쳐진 주검의 조각들을 보고서 구역질을 해대는 녀석도 있었고, 그것을 호기심에 가득찬 눈으로 바라보는 녀석도 있었다. 모두가 '끔찍한 일이야', 하고 주절거리며 자신이 당하지 않은 것에 안도하고 있다.
"이 아이는 어떻게 하죠?"
중년의 여자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갈색머리가 친절하게도 나는 이 사건에 휘말린 소녀니까 정신적으로 충격이 클 것이다. - 라고 설명해준 덕분에 나는 영락없이 피해자의 자리에 오르고 말았다. 여자의 말에 주위의 녀석들도 함께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시선은 여지없이 나에게 집중되었고, 나는 그것이 엄청나게 싫었다. 놈들의 안구를 모조리 도려내버릴까, 하고 약간은 과격한 생각까지 해버렸다.
"저는 교단의 견습사제입니다. 이 아가씨는 제가 보호하겠습니다."
아아, 또 저 갈색머리가 나서기 시작했다. 어벙하게 반쯤 감긴 눈이 왠지 믿음이 가지않았는지 마을의 녀석들이 서로를 번갈아보다, 남자가 입은 퀴스나트 교단의 의복을 보고서 그제서야 고개들을 끄덕였다. 아무리 견습사제라도 말이지. 확실히 교단의 위력이 큰가보네. 남자의 말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고집스런 표정의 중년 남자가 사제에게 말을 건냈다. 입고있는 고급스런 옷을 보아하니, 이 마을의 권력자겠지.
"예에, 그럼 부탁드립니다. 이 아이는 저희 마을 사람이 아니거든요. 아무래도 닉슨 패거리 놈들이 다른 마을에서 데려온 아이인가 봅니다."
닉슨? 아아, 내가 먹어치운 그 놈들 중 하나의 이름이겠구나. 그러고보니, 두녀석이 도망쳤었는데.
"닉슨...이라는 분은 주위의 평판이 좋지않았던 모양이군요."
"평판이고 뭐고, 그 녀석은 마을의 수치였습니다. 얼마나 악독했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군요."
중년 남자는 뿌드득, 소리가 나올 정도로 이를 갈며 죽은 녀석을 욕하기 시작했다. 뭐야, 이제보니 그 녀석 꽤 나쁜 녀석이였잖아, 키득.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욕을 듣다니말야.
"예에..."
고인에 대한 험담이 불편했는지, 이 갈색머리의 견습사제는 그저 '예에-'거리며 그 말을 넘겨버렸다.
"확실히 제 아들이긴 하지만 닉슨은 못된 놈이었습니다..."
그 녀석의 아비인건가? 스스로를 닉슨이라는 녀석의 아버지라고 밝힌 늙은 노인이 중년 남자의 말을 끊어버리고서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무리 못난 놈이라도 이렇게 죽어버리다니..."
노인이 바닥에 쓰러진 채, 자신의 아들인지 아닌지 확실치 않은 주검의 흔적을 바라보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아아, 짜증나는군.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죽여버릴까? 궁상이나 떨어대며 다 죽어가는 송장이 귀에 거슬리게 울어대니, 신경이 쓰여서말이지. 나는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자아, 여기서 부분 변화시켜 내 앞의 생물들을 모조리 쓸어버리자. 그러나 내 행동을 끝내 이어지지 못했다.
갈색머리 견습사제가 나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어째서일까, 나는 녀석이 앞에 나타나자마자 그것을 행하는데에 망설이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전혀 모르겠다. 뭐가 죄송하단거야?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네. 마치 자기가 그 녀석을 죽인 것 같이 말하고있다. 실제로 녀석을 죽이고 잡아먹은 것은 나이지만, 어째서 녀석이 노인에게 그런 사과를 하는것일까? 아까전에도 느낀 것이지만, 이 견습 사제놈은 특이한 녀석이다.
"제가... 조금이라도 빨리 왔더라면..."
조금이라도 빨리 왔더라면, 무언가가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하는건가? 아니, 달라지는 건 없다. 죽은 녀석이 다섯에서 여섯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네가 늦게 온 것은 불행이 아니라 행운이다. 만일 내가 식사하고 있을 때 네 녀석이 나타났더라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베어버렸을테니까. 이 갈색머리 녀석은 바보다.
"그래도 저 아이는 지켜주셨잖습니까?"
자책하는 멍청이 사제를 위로하려, 어떤 녀석이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누가 누굴 지켜줬다는건지. 갈색머리의 사제가 정말 다행이야,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
나는 무표정으로 그 녀석을 따라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저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할 말이 없었다. 무서운 사건에 휘말려서 아무말도 못하고 벌벌 떨고있는 가녀린 소녀의 흉내라도 내야하는 걸까나?
"아차,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교단의 견습사제, '넬 노튼' 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먼저 밝힌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예법이라고 얼핏 들은 것 같다. 이름따위 알고싶지 않았는데, 이 녀석은 내가 자신의 이름을 몰라서 말하기를 망설이고 있다고 착각한 것 같다. 무지 제멋대로인 녀석이네. 착각도 수준급이고.
"저, 아가씨의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에...?"
타인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이름' 에 대해서 물어온다. 사실 나에게 이름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서로 접촉할 일이래봤자, 영역다툼이나 먹이를 두고서 싸우는 정도가 전부인 우리 '앙풰에서 흘러온 자'들이 이름따윌 가질 이유는 없으니까. 인간들이 강조하는 예절따위, 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장으로 확대되면 아무런 소용도 없어진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전투에 들어가는 행위는, 내 입장에서 보았을 때, 비웃음거리도 안 될 정도의 멍청한 짓이다.
"예에?"
그러나, 막상 이런 질문을 받아버리니 나의 사고는 정지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에 직면해 본 것도 처음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몰랐다. 나는 이름같은게 없다. 다만 서쪽의 인간들은 나를 지칭하여 '키세아나자드(kiseanazade)'라 부르더라. 적홍색의 마수, 그러니까 우리들의 사정을 모르는 인간들이 전설에서나 나오는 붉은 괴물과 나를 겹쳐서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녀석에게 '나는 키세아나자드다.' 하고 말해버리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련지. 아니, 내가 왜 이런 걱정을 하고 있는거지? 이름따윌 밝힐 이유는 없는데다, 그냥 다 쳐죽여버리면 그만이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이것들은 그냥 나를 귀찮게하는 날벌레다.
"..."
침묵을 유지한 채 오른손에 신경을 연결했다. 아아, 그렇지. 옷을 준 건 고마워. 마침 필요했었으니까.
"아, 역시 정신적인 충격에 의한 일시적인 기억상실증이군요..."
"...아?"
자신을 넬이라 밝힌 저 남자의 입에서, 황당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억상실증? 내가? 나는 농담에 가까운 발언을 듣고서, 웃어야할지, 아니면 다른 어떤 반응을 해야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쩜... 얼마나 무서운 일을 당했으면..."
방금 전의 그 중년 여자가 나를 동정의 눈길로 바라본다. 어이, 거기까지 하라고. 설마 저 어이없는 말을 믿는건 아니겠지?
"불쌍해라... 남자들에게 납치까지 당한데다, 요괴에게 습격당해서 기억상실까지..."
...소설들 그만 쓰시지? 나는 점점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누굴 정신병 환자로 내몰려는 거냐, 이 망할 원숭이놈들이...
"아아, 그만!!!"
나는 소릴 질러버렸다. 이런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맞장구를 쳐줄 정도로 나는 착하지 않다. 비운의 여주인공이 되어버리는 것 만큼 짜증나는 일은 없으니까.
"저는 말이죠-!"
나는 인간을 연기하는 것에 감정이입이라도 해버린 것일까, 나도 모르게 '저'라는 말로 나를 가리키며 말해버렸다. 동족들이 보았다면, '정말 예의바른 요괴로군.'하며 박수라도 쳐줬을 정도의 바보짓을 해버렸다. 내가 그 실수를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게다가 나는 뭔가를 말하려다, 뭘 말하려고 했는지도 망각한 채, 말문을 닫아버렸다. 아니,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멍청한 구경꾼들이 떠드는 것을 멈추고서, 나에게 시선을 맞추어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부담스러운 시선들이 겹치자, 나는 말을 할 수가 없게되어버렸다.
"...아가씨는?"
되물어오는 넬이라는 녀석이 시선을 피해버렸다. 이 착각의 화신과 같은 녀석 앞에서 허튼 소리를 했다면, 보다 상황이 확대되어 버릴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평소보다 두뇌회전이 빨라졌는지 뭔가를 떠올렸다. '키세아나자드(kiseanazade)'라는 인간들이 나에게 붙인 이름을 써먹으면 어떻까?
"키리아."
어감이 이상했다. 붉은색을 뜻하는 키세아나의 앞글자를 따서 '키리아'로 바꾸어버렸다. 나는 떠오른 것을 마음대로 내밷은 주제에, 말하고 나서 왠지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제 이름이예요."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처리. 나는 원인모를 자신감에 도취되어 당당해졌다. 그러나 그것이 멍청한 짓이라는 것을 깨닫는데에는 별로 오래걸리지 않았다.
"아, 키리아양이군요. 원래 살던 곳이 어디죠?"
추가적으로 물어오는 넬의 질문공세. 나는 뭐하러 거기서 말을 이어간 것일까, 하고 자책해봤자 때는 이미 늦었다. 넬이라는 견습사제가 눈을 빛내며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있다. 여기서 대답하면, 이 넬이라는 녀석은 반드시 나를 거기까지 데려다주려 할 것 같았다. 나는 비장의 카드를 뽑았다.
"...기억안나요."
...비장의 카드는 커녕 나의 패배를 인정해버린 것 같아서 오히려 기분이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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