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트메어
|
날짜: 2007.02.28 18:53:34 조회: 775 추천: 0 |
보라색의 머리를 휘날리며, 소녀가 우리에게 손짓을 한다.
그것이 '반가워'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이 자리에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붉은 색의 대지가 우리의 발 밑을 엄습해온다.
숨을 쉬기가 힘들다.
들여마시는 공기가 무겁다.
높은 곳에서, 소녀는 미소를 짓으며 우리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는 나지막히 속삭인다.
"...여기서 기화(氣化)해버려, 모조리"
나는 물론, 주위의 그 누구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
.
.
.
.
.
the distress
-4-
정신이 돌아왔다. 그것은 나 스스로의 의지라기 보다는 무언가에게 이끌려서 돌아온 것이라는 표현이 정확한 느낌. 그래, 나는 '깨어난 것'이 아니라, '깨어진 것'이다. 그 '힘'은 내가 누워있는 것을 방해하며, 억지로 일으켜 세우려했다. 강제력은 없었다. '억지로' 당하는 일 임에도,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 몸을 움직인다. 나는 결국 그 '힘'에 이끌려 일어나 방금 전까지 누워있던 침대에 걸텨앉는다.
"이제서야 움직이네. 끊어진 회로를 이어붙이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안 움직여준다면 곤란하지."
의식을 잃기 직전에 들렸던 목소리에, 나는 시선을 향한다. 길게 늘어뜨린 장발의 보라색, 그것과 같은 색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호기심에 가득 찬, 처음보는 동물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는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은 표정.
"...?"
앳된 얼굴을 하고 있는 보라색 머리의 소녀는 어째서 인지 온 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에 아무렇게나 칭칭 감아놓은 붕대는, 매는 솜씨가 서툴었던지 종종 틈 사이로 하얀 살결이 비친다.
"뭐야, 어디가 잘못된건가? 이상하네, 잘못 연결한 데는 없는 것 같은데."
보라색의 소녀는 내 앞으로 다가왔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 분명히 그 때, 문 앞에 있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확실하다. 감옥? 그러고보니 여기는 어디? 나는 뒤늦게 주위를 둘러본다. 내가 누워있던 침대는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나무침대였다. 그러나 그것은 휴식을 위해서 사용하는 용도로는 쓰일 것 같지않다. 그것은 침대의 구조를 온전히 갖추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을 자는 사람의 몸을 편안히 지탱해 주어야 할 시트에는 파란색의 곰팡이가 여기저기에 둥지를 틀고 있었고, 가뜩이나 초라한 목각 장식은, 반 이상이 무언가에 파먹혀서는 '조형의 미'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에..."
침대는 그렇저렇 넘어가더라도, 주위의 모습은 그렇게 쉽게 생각할 것이 아니었다. 그 구조는 내 눈을 어지럽게 만들 정도로 기괴했으며, 딱히 표현하자면, '어린아이들이 아무렇게나 붙여서 이어놓은 판자로 만든 장난감 집'이라고 할까? 그것과 비교했을 때는 어디까지나 틈새하나도 없이, 어떤 의미에서는 완벽하게 이어진 집이겠지만, 제정신이라면 이런 곳에서 살고 싶은 인간은 아마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앞으로 나왔다가, 들어갔다가, 혹은 휘어졌거나, 뛰어나왔더나 하는 식의 공간은, 어째서인지 좁게 느껴진다. 내 눈은 금새 피로해졌다.
"아, 멀쩡하잖아."
소녀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보라색으로 빛나는 커다랗고 맑은 눈이, 나를 비춘다.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짧게 고민한다.
"뭐든 말해봐."
소녀는 내가 계속해서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째, 단호한 명령조의 말투이지만, 귀엽게 느껴진다.
"여긴 어디죠?"
나는 처음에 물어봤어야 할 '당신은 누구?'보다 '여기는 어디?'를 먼저 묻기로 했다. 적어도 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감옥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또 모르잖아, 저 소녀와 같이 이상한 방에 들어오게 된 것일지도- 이 장소의 취지를 알아야만 한다.
"음, 인간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여긴 내가 소유한 '집'이다. 용도는 너희들이 쓰는데와 별반 차이는 없을 거야. 아마도."
'인간의 관점에서'라니. 이 소녀는 자신을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어찌되었든, 여기가 감옥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아마도'라는, 뒤에 덧붙인 말이 신경쓰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괜찮겠지.
"아, 네에...."
"...너 무지 재미없네."
소녀는 내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노골적으로 지루함을 드러낸다. 그 어린아이같은 솔직한 모습에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당신은...?"
핀치가 약간 어긋나가긴 했지만, 나는 뒤늦게 그녀에게 질문했다. 소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못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역시나 귀엽게 느껴지는 움직임.
"나?"
어쩐지 이상한 반응이다. 이 방 안에 있는 사람이라곤, 나와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없을 텐데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나는 그녀의 답변을 기다리기 위해 아무런 말도 하지않았다. 그런 나의 마음를 알아차렸는지, 곧 소녀는 입을 열었다.
"'나'라는 존재의 무엇을 묻는 것인지, 그 어디에 의문을 제시하는 지, 나는 네 의도를 모르겠다.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다시 정리해."
...이 아이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일까? 소녀가 말하는 것을 보아, 이 아이는 일반적인 인사라거나 하는 그런 것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저기, 이름이 뭐죠...?"
"이름? 아아, 너희들이 타인을 인식하기 위해서 지칭하는 일종의 구분책말인가?"
이 소녀는 똑똑해보이지만, 어딘가 바보스러운 부분이 있다. 소녀는 무표정하게 지그시 시선을 위로 향하며, 무언가를 생각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다른 존재가 나를 향하며, 부르는 걸 '이름' 이라고 하는거겠지?"
생각을 끝냈는지, 소녀는 나에게 '이름'의 의미를 되물어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가 말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아아, 아까 태워버린 놈들이 모두 입모아서 나를 부르더라."
'태워버린'? 이 아이, 태워버렸다고 했다. 자신을 불렀다는 것은,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를 뜻하는 것이겠고, '놈들'이라고 가리킨 것은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그녀의 말에서 어느정도 예상 할 수 있었다. '태워버렸다.'라고 말했다. 사람을? 나보다고 키가 작은 데에다, 가녀린 몸을 가진 이 소녀가, 무슨 수로 사람들을 태워버렸다는 것일까? 소녀는 즐거운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간다.
"'마녀'라고."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