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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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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6.02.17 22:44:54 조회: 296 추천: 0 |
"곤란한걸──"
흰 눈과도 같은 은발의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기른 사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 손을 입가로 모은다. 두터운 더블 코트와 양털로 짠 듯한 머플러를 두르고, 아주 훈훈해 보이는 벙어리 장갑으로 무장했지만, 추운 건 할 수 없는 모양인지 연신 몸을 움츠린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나머지 손은 주머니에 단단히 틀어 박혀 있는 모양이다. 그는 주위를 연신 둘러 보았으나 보이는 것은 순백의 설야(雪野) 뿐이었다. 그의 옆에는 망가진 모양인지 검은색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자그마한 노란색의 뉴비틀이 서 있었다.
"으으──곤란해──"
사내는 주위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인식한 모양인지 울상이 된 채 중얼거렸다. 바람은 이상하게도 사내가 나온 이후부터 더욱 거세게 불어오고 있었고, 날씨는 점점 험악해져 눈까지 내릴 상황에 이르렀다. 사내는 얼굴을 진탕 찌푸리며 말했다.
"으그윽──세상은 불공평하다구──"
사내는 정말로 억울한지 하늘을 바라보며 불만을 토로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그의 양뺨을 때리는 차가운 바람 뿐, 사내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잠시 동안 고개를 숙인 채 바람을 피하고 있던 사내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모양인지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뒤적, 뒤적, 한참 동안 주머니 안을 휘젓고 다니던 사내의 손에서 꽤나 큰 모양의 전화기가 들려 있었다. 소위 말하는 '구시대의 산물'이랄까. 하지만 사내는 그것을 바라보며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좋아──!"
사내는 재빨리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통화 버튼을 강렬하게 누른 사내. 그는 곧 핸드폰을 자신의 귀에다 가져다 대었다.
-지금 고객님께서 거신 곳은 발신이 제한된 구역──
"빌어쳐먹으으으을───!!"
분노에 휩싸인 사내의 손에 들려 있던 거대한 핸드폰이 백색의 눈 속에 파고들어갈 무렵, 사내의 포효가 눈으로 뒤덮인 들판에 창창히 울려 퍼지고야 말았다.
창천의 노래, 대지의 약속(The Symphony of Blue sky, The Promise of Earth)
그건, 아주 오래전의 약속.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아련한 추억의 단편.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나를 이끄는 단 하나의 지표가 되어 버렸다.
그 기억을 되찾기 위해, 나는 살아오고 있다.
아득한 저편에서 들려왔던, 그 하나의 약속을 위하여──
"──잠시, 졸았나보군…."
좁은 차 안에서 몸을 뒤척이던 사내가 눈을 떴다. 살을 에는 추위에 깼다고 하는게 옳을 것이다. 아무리 차 안에서 문을 닫고 있다 하더라도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나보다. 차내의 공기는 이미 차가워질대로 차가워져, 인간의 몸으로서는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되버린 것이다. 사내도 그런 결론에 도달했는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 했으나──
"뜨억──!"
곱절로 몰려드는 바람에 서둘러 문을 닫고야 마는 신세에 처하게 되었다. 잠깐 동안의 접촉이었지만, 사내의 머리 속에는 밖의 풍경이 머리에 그려지는 모양이었다. 창문에는 성에가 잔뜩 끼어 있어서 알아볼 수는 없으나, 체감온도는 이미 영하 40도를 돌파한 듯 하고, 밖으로 내밀었던 부분에 새하얀 눈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장난 아닌 폭설이 내리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사내는 울상을 지으며 생각에 잠겼으나 잠시 후 온 몸으로 비명을 지르며 차 안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해결책은──없었던 것이다. 사태를 제대로 파악한 듯, 그는 머리를 쥐어잡고 생각에 잠기기로 결정한 모양. 그러나 그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들은──
'나가면 죽을 거야,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차에만 짱박혀 있어도 죽을 거야, 대체 날씨는 언제 풀리지? 어째서 라디오는 불통인거야, 별로 많이 온 것 같지도 않은데 통화 불가능지역이라고? 대체 이 나라는 통신국이 5개도 안되는거야 뭐야, 문을 열며는 바람이 들어오는데 어떻게 부탄가스를 틀어서 밥을 해먹지? 생라면밖에 없는데 그냥 씹어먹어야 하는거야?'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말 그대로 패닉 상태에서 흘러나오는 절규 뿐이었다. 절망감, 후회감, 자괴감과 같은 비판적인 성향이 강한 심상들이 사내의 온 몸을 후벼파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냥 안갔으면 이런 곳에서 죽지도 않을텐데, 어머니, 아직 결혼도 못하고 손주도 못보여드리고 이런 외딴 곳에서 홀로 쓸쓸하게 가버리는 이 자식 놈을 이 곳에 와서 구출해 주신 다음 죽여 주십시오. 그리고 동생아, 이 오빠는 동정을 차마 풀어헤치지도 못한 채 꽃다운 인생의 끝을 보게 되는구나, 하지만 동생아, 너에게는 좋은 처남이 생길 것이니 그때는 한번 내려와서 구경해주겠다──'
──뭐랄까, 유언 아니야?
똑──똑──
"하아?"
사내는 순간적으로 귀를 의심하고야 말았다. 맑게 울려 퍼지는 유리의 진동음. 더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분명한 소리였다. 아마 휘몰아치는 바람에 자그마한 돌맹이가 창문을 두드렸다고 생각되자, 그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괜히 희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 절망하는 사람을 두번 죽이는 것이라고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이렇게 당할 줄은 몰랐던 것이겠지.
똑──똑──똑──
"──?"
다시금 들려오는 소리. 자세히 들어 보니, 그것은 '돌'과 같은 딱딱한 것이 부딪히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래, 그것은 사람의 살갗이 닿아있는 부분과 그것의 안에 보호되어 있는 하얀 뼛조각이 부딪히는 소리──
"살려주세요!!"
사내는, 문을 벌컥 열며 정말로 구원자라도 만난 것처럼 소리쳤다.
"어라──?"
문 밖은 사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백색의 설원은 그대로였지만, 사내가 생각했던 바람은 없었다. 눈은 내리고 있었지만 포근한 함박눈이 따뜻한 기류와 함께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사내의 눈 앞에는, 이 백색의 설원과 너무도 대조되는, 붉은 색의 코트를 단정하게 차려 입은 소녀가 서 있었다. 그녀는 사내의 반응에 약간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연다.
"저기──괜찮으신가요?"
"아, 에, 괜찮습니다."
사내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은 모양인지 말을 더듬는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내의 앞에 서 있는 여성의 자태는 너무도 고왔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극한의 상황이 만들어낸 연출이라고 봐도 무방하다만, 그것을 제하고 나서라도 소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녀의 옷과 매치되는 붉은색의 단정한 포니테일 머리, 백옥과도 같은 피부, 그리고 깨끗하다 못해 동공조차 없는──눈동자. 어딘가를 바라보지 않는, 그런──슬픈 눈동자였다.
"아아──."
사내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소녀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라는 것을. 그러나 소녀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내를 향해 손을 뻗는다.
"저기, 일어나실 수 있나요?"
"고, 고맙습니다."
사내는 뻗어오는 손을 거부하지 않고 조심스레 쥐었다. 따뜻한 체온이 장갑을 너머 전해져 온다. 그제서야 사내는 자신이 살았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약간 걱정되는 것은 그 소녀였다.
"저기──"
"아, 저는 라메리아라고 해요. 라메리아 소레인."
갑자기 웃으며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소녀, 라메리아를 바라보던 사내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 깨달은 모양인지, 맞잡은 손에 약간의 힘을 주며 말한다.
"하메리온 엘리언스 입니다."
"하메리온이라…… 멋진 이름이네요."
라메리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살짝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맞잡은 손을 아래 위로 흔들며 말한다.
"여기는 추운데, 계속 서 계실 건가요?"
"아, 아니, 아닙니다."
하메리온은 고개를 양 옆으로 내젓는다. 그런다고 해서 그녀가 그 행동을 볼 수 없을테지만, 그저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한 것 뿐이다. 하메리온은 어느새 라메리아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하메리온의 머리에는 단 하나의 생각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차 문 안 잠궜다.'
……그런거다, 뭐.
라메리아는 눈이 안 보이는 것 치고는 길을 잘 찾아가는 것 같았다. 눈길을 자주 걸은 모양인지 걷는 기술도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뒤에서 따라가는 하메리온은 자꾸만 뒤쳐지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묻고 싶은게 너무나도 많았으나, 걷는 것만으로도 지친 모양인지 연신 숨을 몰아 쉴 수 밖에 없었다. 꽤나 걸어간 것 같지만 라메리아가 가는 곳은 도통 알 수 없었다. 가도 가도 끝도 없는 설원만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 결국 하메리온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 마쉰 후, 그 많은 질문 중 하나를 선택하여 입 밖으로 내보냈다.
"저기, 라메리아 씨?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것 맞나요?"
"아니요~~!"
순간 하메리온의 발걸음이 '뚝' 멈춘다. 뒤따라서 라메리아의 발걸음도 멈춰진다. 하메리온은 억지로 웃음지으며 말했다.
"에, 에이. 농담 마세요. 그럼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하메리온 씨를 요리하러 가요."
"■■■■■■───?!?!?!?!"
알 수 없는 괴성이 하메리온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사람이 낼 수 있는 비명의 한계를 넘은 것 같아 보인다. 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떠는 하메리온. 그의 머리 속은 이러하였다.
'그, 그렇지. 설원에서는 사람을 잡아 먹는 설인이 있다고 들었어! 아니, 설인은 털이 소봉봉 나있고 몸은 2m 가 넘는 괴물 아니었어? 저건 사람, 게다가 여자, 게다가 소녀잖아? 세상은 정말이지 불공평하다고!'
패닉 상태에 빠져 있는 하메리온, 그를 바라보던 라메리아의 얼굴에는 슬며시 미소가 띄워진다. 그리고는 입술을 혀로 할짝이며……
"농담이에ㅇ──"
"잡아 먹지 말아주세요오──!!"
울먹이는 눈으로 외치는 하메리온. 라메리아는 오버스럽기까지 한 그의 반응에 파안대소한다. 그리고는 손을 휘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농담이에요, 하메리온 씨. 순진하시네요, 호호홋."
"그, 그으으……."
하메리온은 왠지 분한 표정으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본다. 그녀는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리며 말했다.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보일거에요. 걱정은 마세요."
하메리온은 순간적으로 그녀를 의심하는 마음을 가지고 말았으나, 그녀를 믿지 않는다면 이 곳에서 미아가 된 후 58년 후 썩지 않은 시체로 발견될 미래를 생각하여 그녀를 따라가기로 마음 먹었다. 라메리아는 곧 발걸음을 떼었고, 하메리온 역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얼마나 걸었는지도 모른다. 분명 라메리아는 '조금만 더 가면'이란 소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이미 1시간은 족히 지난 것 같다. 눈 속을 움직이는 것은 생각 외로 쉽지 않다. 푹푹 빠지는 것은 물론이요, 그것이 잘 빠지지도 않아 오르막길을 오르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거의 그럼 기분이 들기 때문에 피로는 과중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힘이 진창 빠져버린 하메리온, 그러나 앞에 가고 있는 적발의 소녀, 라메리아는 아직도 성성하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간혹가다 여유까지 부린다.
"하메리온 씨, 좀 쉬어 갈까요?"
"아, 아니, 괜찮아. 어, 어서 가자……."
그녀는 다시 되묻지 않고 '알았어요' 한 마디만을 남긴 채 발걸음을 옮겼다. 하메리온은 이럴 때 '남자의 자존심'이 뭔지라고 원망하며 자기를 자학한다. 한걸음, 한걸음 걸을 때마다 피로가 휘몰아쳐 온다. 이미 춥다는 감각도 벗어났다. 땀은 더블 코트 안에서 무럭 무럭 피어오르고 있다. 그냥 다 벗어 제끼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아, 도착했어요."
그녀의 한마디에, 그런 마음이 싹 가셨다고나 할까. 하메리온은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라메리아의 옆을 향해 맹렬히 달려 갔다. 그녀의 앞에 있는 것은 나트막한 언덕. 그리고 그의 시야에 들어 온것은──순백의, 마을이었다. 세상에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런 마을이 그의 앞에 자리잡고 있었다.
"백색의 마을, 백색 대지(White Plateau)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라메리아는 싱긋 웃으며, 자랑스럽다는 듯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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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유으, 나름대로의 철학이 섞인 작품입니다.[먼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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